# 중국 전기차 기업 비야디(BYD)는 선전증시 상장을 위해 2011년 초부터 반년간 홍콩과 선전,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을 오가며 81회 투자자 미팅을 했다. 시틱증권 등 중국 투자자에게도 투자를 호소했지만 주 타깃은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제프리스 등 미국 투자은행(IB)이었다.
# 세계 최대 배터리기업인 중국 CATL이 홍콩 증시 상장을 앞둔 지난달 11일 “CATL이 미국 투자 자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 국내 투자자에게 주식을 판매하지 않는 ‘레귤레이션 S’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이다. 열흘 뒤 CATL은 목표 공모액 40억달러를 뛰어넘는 53억달러를 끌어모으며 올해 세계 최대 규모 상장에 성공했다.
중국 전기차산업을 이끄는 두 기업의 상장은 중국과 월가의 관계가 불과 10여 년 만에 얼마나 극적으로 변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2001년) 이후 월가 돈으로 중국을 묶어두겠다는 미국의 야심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전문가들은 CATL 상장으로 나타난 미·중 자본시장의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을 통해 주요 2개국(G2)의 패권 경쟁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황금알’ 알리바바도 상폐 위기
지난달 28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홍콩증권거래소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된 중국 기업의 홍콩 복귀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NYSE에 상장된 286개 중국 기업이 상장폐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최근 제기되면서다. 지난달 5일 미 하원 미·중전략경쟁특별위원회는 폴 앳킨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에게 알리바바, 바이두, 지커 등을 NYSE에서 상장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위원회는 “이들 기업이 미국 자본시장의 혜택을 받아 중국군 현대화를 앞당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차이충신 알리바바그룹 최고경영자(CEO)는 즉각 반박했다. 같은 달 24일 마카오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를 겨냥해 “아시아와 전 세계를 잇는 다리를 허물려고 하는 정부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간 알리바바는 미국 자본과 중국 기술이 결합한 대표 사례로 꼽혔다. 2010년대 중국은 미국 자본에 ‘기회의 땅’이었다. 닫혀 있던 13억 소비시장이 글로벌 자본에 문을 열었고, 잠재력 있는 기술 기업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이 중 1999년 마윈이 창업한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의 잠재력에 주목한 소프트뱅크와 야후가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다. 알리바바는 2014년 NYSE에 상장하며 단숨에 시가총액 세계 4위(약 218억달러)에 올랐다.
이후 ZTO익스프레스(2016년·공모가 14억600만달러), 핀둬둬(2018년·16억2000만달러), 리오토(2020년·10억달러) 등 중국 기업의 ‘아메리칸 러시’가 이어졌다. 이런 흐름은 2021년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우버’라고 불리는 디디추싱이 NYSE에 상장한 지 13일 만에 자진 상폐한 게 신호탄이 됐다. 그 배경에는 “디디추싱의 방대한 운행 데이터가 미국 측에 넘어가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중국 당국의 강도 높은 압박이 있었다.
중국 기업의 미 증시 상장 규모는 2021년 약 130억달러에서 이듬해 10억달러 미만으로 확 쪼그라들었다. 패트릭 창 딜로이트차이나 CEO는 “상장을 희망하는 중국 기업 중 미국에 상장을 원하는 비율은 과거 20%에서 현재 5% 미만으로 낮아졌다”고 했다.
중국·중동 자본이 메운 美 빈자리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미국 자본의 중국 진출도 사실상 가로막혔다. 중국 기업에 투자한 뒤 미 증시 상장을 통해 엑시트하는 ‘성공 공식’이 무너진 것이다. 세쿼이아캐피털, GGV캐피털 등 미국 벤처캐피털(VC) 큰손은 현지 법인을 분리하며 중국 시장을 떠났다. 미 정부도 2023년 중국의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사실상 자본 장벽이 세워진 것이다.
CATL의 자금 조달은 이런 흐름을 잘 보여준다. CATL은 홍콩 증시 상장을 앞두고 20여 개 코너스톤 투자사(장기 투자를 약속하고 공모주 일부를 배정받는 투자사)로부터 총 26억달러를 조달했다. 이 중 미국계 자본은 하워드 막스가 이끄는 오크트리캐피털(7500만달러)이 사실상 유일하다. JP모간체이스와 BoA가 기업공개(IPO)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이들의 최종 합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번 상장에 관여한 관계자들은 “CATL은 미국에서 얽히게 될 법적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내 투자를 제한했다”고 설명했다. 미 국방부가 지난 1월 CATL을 ‘중국군 지원 기업’이라고 공표하며 고조된 군사적 긴장이 자본시장으로 전이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신 CATL은 동아시아 및 중동 자본을 중심으로 새 판을 짰다. 중국 국유 석유기업인 시노펙과 세계 4위 국부펀드 쿠웨이트투자청이 각각 5억달러를 투자했고 중국계 투자사 힐하우스캐피털이 2억달러를 댔다. 미래에셋증권(6000만달러)과 징린에셋매니지먼트, 보유캐피털 등도 초기 투자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모하메드 알 하르단 카타르투자청 기술부문 투자책임자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중국은 무시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는 미국에 뿌린 투자금을 거둬들이고 자국 투자를 늘리고 있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중국 국영펀드(CIC)는 4월부터 미국 사모펀드(PEF)에 투자한 10억달러 자산을 매각하고 있다. 부동산, 기반시설 등 미국 자산 규모를 전반적으로 축소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달 CIC의 자회사 중앙후진투자는 자사와 국가사회보장기금(NCSSF), 중국증권금융 등 연기금을 ‘국가대표팀’이라고 칭하며 “중국 본토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한때 1위까지 오른 중국의 미 국채 보유량은 3위로 내려앉았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