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서 열린 한강 ‘2024 노벨 만찬’ 르포
10일(현지시간) 청중 1300명의 시선이 몰린 ‘노벨 만찬(Nobel Banquet)’. 한강 작가는 8세 때 폭우가 쏟아져 처마 밑에 웅크렸던 기억을 떨올렸다.
그는 “산수 학원을 다녀오는 길, 비가 내리자 건너편에도 처마 밑에 선 사람들이 보였다. 그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며 “그걸 바라보며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수많은 1인칭을 경험한 것”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한강 작가는 “읽고 쓰는 데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면, 경이로운 순간을 거듭했다. 언어의 실을 따라 다른 마음의 깊은 곳, 또 다른 내면과의 만남을 이뤘다”면서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언어, 이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어떤 체온을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깊은 울림을 주는 그의 수상 소감에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 만찬장이 울릴 만큼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노벨만찬 4시간 넘게 진행
한국 언론 8곳만 초청받아
만찬 후 무도회로 막내려
한강 작가가 ‘노벨 메달’을 받고 두 시간 후 열린 노벨 만찬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행사다. 로비는 통하지 않는다. 한국기자는 25명이 시상식에 초청됐지만, 만찬 참석까지 승인받은 기자는 8명(방송사 3곳, 신문사 4곳, 통신사 1곳)이었다. 그러나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식대가 ‘공짜’도 아니다. 승인 후 한 끼 식사비 3600크로나(약 48만원) 선입금을 완료해야 ‘겨우’ 참석이 승인된다.
그래도 이날 만찬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시각, 청각, 후각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종합 예술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만찬장 로비에 들어서니, 참석자 전체 명단과 좌석배치도가 인쇄된 64쪽짜리 소책자가 제공됐다. 1300명이 동시에 식사하기에 본인 자리를 찾기가 ‘미로’에 가까운데, 혼란을 방지하고자 노벨 재단이 아예 책자로 안내한 것이었다.
총길이 25m, 84명이 앉는 테이블A(헤드테이블)이 식장을 세로로 가로지른다. 다른 인원은 그 옆의 60여개 테이블에 앉게 된다.
테이블A엔 한강 작가를 포함(좌석번호 A-72)해 올해 노벨상 수상자,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부부와 왕가의 후손들, 그리고 노벨 재단 주최 측이 앉는다. 과거 노벨상 수상자도 만찬 참석시 ‘특급 대우’를 받는데, 이날 노벨문학상을 2019년에 받은 올가 토카르추크(A-9)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노벨상 124년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란 공통점과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로지르는 문학’이란 분모를 공유한 둘은 반갑게 인사했다. 만찬의 핵심 인물인 칼 구스타브 16세 국왕은 정중앙 좌석인 A-22에 앉아 한강 작가와는 다섯 자리 떨어져 있었다.
알프레드 노벨을 추모하는 국왕의 건배사로 성대한 개막을 알리는 노벨 만찬은 4~5시간이나 걸린다. 요리는 총 3코스로 에티타이저(1요리)는 비트와 호박이 들어간 염소치즈 요리, 메인디쉬(2요리)는 트러플을 섞은 닭고기 퀘넬, 디저트(3요리)는 캐러멜화한 사과로 만든 테린이었였다. 퀘넬은 음식을 숟가락 모양으로 만든 요리를, 테린은 차갑게 굳힌 패티를 뜻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메인디쉬가 서빙되자 기자를 포함한 테이블은 ‘탄성’을 질렀는데 ‘폼 드 뷔(Pomme de Vie)’란 이름의 사과 브랜디가 들어간 소스가 그야말로 ‘천국의 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다들 접시 아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노벨 디저트’로 불리는 역사적인 요리 역시 감탄을 자아냈다. 달게 절인 사과를 1mm 두께, 1cm 부채꼴 모양으로 썰어 겹친 모양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귀한 예술품 같아 포크를 대기가 망설여질 지경이었다.
그릇 하나, 포크 하나, 나이프 하나에도 모두 뒷면에 ‘NOBEL(노벨)’이 새겨져 있었다.
노벨 재단 근무 18년차인 레베카 옥센스트롬 언론담당 헤드는 “와인잔 하나가 900크로나(약 12만원)”이라며 “매년 이곳에 오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고 참석자들도 만족도가 높아 뿌듯하다”고 설명했다.
노벨 만찬은 단지 한 번의 사치스러운 식사만은 아니다. 요리와 요리가 서빙되는 사이마다 공연이 한 차례씩 펼쳐져서다. 이날은 총 4번의 공연이 펼쳐졌다. ‘노벨 디저트’가 나오기 직전 40명의 셰프들이 불꽃이 타오르는 거대한 접시를 왼손에 받치고 2층 계단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장면도 장관이었다.
서빙 직원들은 모두 스웨덴 대학생들이며, 노벨 만찬 ‘아르바이트’는 그 자체로 권위가 높아 학생들도 경쟁률이 높다고 전해진다.
식사가 끝나자 다들 계단을 올라 2층에서 열릴 ‘노벨 무도회’로 향하면서, 한 사람당 1개씩 제공된 ‘노벨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실제 노벨 메달과 똑같은 6.6mm 크기와 만들어진 초콜릿이었다.
최고예우 받은 한강…스웨덴 왕족이 직접 에스코트
10일(현지시간)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은 감동과 미소의 공존장(場)이었다.
시상식 개회 1분 전, 장내를 가득 메운 1500명 참석자는 침묵과 정적 속에서 2024년 노벨상 수상자들, 칼 구스타프 16세를 비롯한 스웨덴 왕족들, 그리고 귀빈 입장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때, 한 참석자가 다소 ‘독특한’ 재채기(기침)를 하자 이 ‘돌발상황’은 누군가의 웃음으로 이어졌다. 근엄한 표정을 하고 않았던 좌중에 긴장감이 확 풀어지면서 서서히 웃음이 번지더니 1500명 전부가 폭소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수상소감 진행 스웨덴 사회자
“영광입니다” 한국어 깜짝인사
한강 작가는 이날 노벨상 수상자 11인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시상식장 우측 2층 발코니 2108번 좌석에서 기자가 지켜본 한강 작가는 본인의 자리에 등을 기대고 앉은 수상자들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또 다른 수상자들은 노벨상 증서(디플로마)와 노벨 메달을 수상한 뒤 의자 아래 바닥에 놓고 편하게 앉아 있었는데, 한강 작가만 무릎 위에 증서와 메달을 올려놓아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노벨 만찬이 열린 스톡홀름 시청에선 ‘한국어’가 발음됐다. 4시간의 만찬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이 진행됐다. 스웨덴의 한 대학생이 한강 작가를 소개하다가 마지막에 한국어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소개하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현장의 한국인들은 한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2018 노벨문학상 토카르추크
“난 한강의 소설을 사랑한다”
노벨 만찬이 시작되던 때에도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벨 만찬의 첫 개회는 아스트리드 소더버그 위딩 노벨 재단 이사회 의장의 ‘건배 제의’였다. 짧은 연설이 끝났지만 한국말로 “건배”에 해당하는 ‘구호’가 나오지 않자 노벨 만찬에 처음 와본 참석자들은 ‘도대체 언제 잔을 부딪쳐야 하는지’를 몰라 서로 눈치만 보다가 모두 같은 생각임을 알고 웃음을 터뜨렸다.
노벨 만찬 직후 열린 무도회는 영화에 나올 법한 풍경이 연출 중이었다. 서빙 직원 역할을 맡았던 스톡홀름의 남녀 대학생들이 춤을 추고 악단이 흥겨운 노래를 연주했다.
한강 작가는 다소 소란스러운 장내 옆에서 지인들의 대화하고 있었는데,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가 한강 작가를 찾아와 만나자 주변 사람들의 휴대전화 셔터가 터졌다. 무도회 후 밤 12시가 넘은 시각, 올가 토카르추크는 택시를 타지 않고 숙소까지 걸어갔다. 이때 우연히 기자와 마주친 올가 토카르추크에게 “3분만 대화할 시간을 달라”고 묻자 그는 “난 한강을 너무 사랑한다. 한강의 소설을 너무 사랑한다. 이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웃으면서 밤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노벨 시상식 영상만 보면 모두들 잘 차려입은 연미복과 이브닝드레스 차림이지만, 막후는 전혀 달랐다. 잘 차려입은 외모와 달리 ‘꼬깃꼬깃한’ 비닐봉지를 외투와 함께 보관해달라며 직원에게 조금 성을 내는 백발의 부부도 있었고, 식장에 도착한 뒤 등산화를 벗고 앞코가 반짝반짝한 구두로 갈아신는 노신사도 눈에 띄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존 홉필드 프린스턴대학교 명예교수는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아 시상식 연단 위에서 두 개의 등산용 스틱을 손에 쥐고 걸었다.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제프리 힌턴이 국왕에게 노벨 메달을 받자, 그를 축하하러 등산용 스틱을 놔버리고 힘겨운 몸으로 크게 박수를 치며 축하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스톡홀름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