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페인'을 마주하는 여행길, 역사는 일상이 되고 일상은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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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 그러나 남자는 울리는 전화기를 한 번도 확인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 그들의 수트 케이스, 표정 등만을 심혈을 기울여 관찰하는 중이다. 마치 태어나서 공항이라는 곳에 처음 온 것처럼, 그는 비행시간 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사람들과 공항의 풍경을 지켜본다. 그에게 공항이란 공간은 어떤 존재일까. 그가 잠시 후면 떠날 이 거대하고도 무참한 여정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리얼 페인 (A Real Pain)>은 공항에서 시작해서 공항으로 끝나는 일종의 '여행 영화’이다. 도리 (Dory) 할머니의 죽음 이후 서로를 만나지 못했던 사촌 형제, 데이비드 (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 (키에란 컬킨)는 할머니가 남긴 약간의 돈으로 홀로코스트를 테마로 하는 그룹 투어를 하기로 한다. 영화의 오프닝은 벤지가 걱정되는 듯 쉴 새 없이 전화를 해대는 데이비드와 울리는 전화에는 관심도 없는 듯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벤지의 교차편집으로 채워진다.

이들은 결국 별문제 없이 순조롭게 폴란드에 도착해 현지에 있는 그룹과 합세한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하게 되는 멤버들은 모두 (데이비드와 벤지의 할머니처럼)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손이거나 유대인 이민자들이다. 이들은 전쟁과 살상의 상흔을 마주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던 벤지와 데이비드의 이야기, 그들 가족의 역사도 여행의 마디마다 드러난다.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리얼 페인>은 <소셜 네트워크>와 <나우 유 씨 미>로 부상한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두 번째로 각본과 연출을 함께한 작품이다. 그의 연출 데뷔작인 <웬 유 피니쉬 세이빙 더 월드>(2022)는 인디애나에 사는 한 소년이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한 소녀를 구하는 성장 영화로 아이젠버그가 직접 쓴 동명의 오디오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 역시 그는 상처의 치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만 이번엔 '홀로코스트’라는 더욱더 거대하고 끔찍한 역사적 비극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이젠버그는 십 대부터 연기를 시작한 (이제는) 중견배우지만,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뉴요커에 데일리와 에세이를 연재했으며 맥스위니스를 통해 수많은 단편을 출판했다. 아이젠버그의 이러한 이력은 분명 이번 영화 <리얼 페인>에서 빛을 발한다. 여행 영화의 외투를 입고 있지만 엄연히 '홀로코스트 영화’인 <리얼 페인>은 당시 참상 피해자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 즉 그들이 현재 안고 있는 일상적인 상처, 가령 벤지가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 혹은 투어 멤버 중 하나인 마샤가 최근 남편으로부터 급작스러운 이혼을 당했다는 것 등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역설한다.

이는 지난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관습적이지 않은 접근이기도 하고 어쩌면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특히 상업영화가 홀로코스트를 재현한다고 했을 때 주어지는 역사적인 무게를 고려했을 때 더욱더 그러하다. 이제껏 제작되었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주로 대형 역사극의 (<쉰들러 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1994), <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 2002)) 형태를 통해, 당시의 비극을 직접 목도하는 일인칭 시점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은 이러한 암묵적인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럼에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리얼 페인>은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데 있어 '불경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는 작은 상처를 통해 더 큰 상흔을, 혹은 거대한 비극을 통해 인생 찰나의 비극을 마주하고 극복하는 여정을 그린다. 그렇게 역사는 일상이 되고 일상은 역사가 된다. 아이젠버그에게 (그 역시 극 중 데이비드처럼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다) 홀로코스트는 역사이자, 일상인 것이다.

여행의 말미에서 데이비드와 벤지는 할머니 도리가 살았던 생가를 방문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할머니의 생가를 가보는 것은 이들이 애초에 이 영화를 기획했던 이유, 그러니까 숙원사업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은 이웃들의 불평으로 인해 내부는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현관만 밟아보고는 공항으로 향한다. <리얼 페인>의 곳곳에서 보여지는 또 다른 라이트 코미디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벤지와 데이비드는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JFK 공항으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서로의 소원함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데이비드는 벤지를 저녁에 초대하지만 벤지는 정중히 거절한다. 대신 그는 영화의 초반에서 그랬듯 한참 동안 공항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렇게 두 형제는 긴 포옹을 나누고 각자의 '역사’를 향해 떠난다.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리얼 페인>은 끝내 '리얼 페인’이 무엇인지 답을 주지 않는다. 혹은 복수의 답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고통은 나의 우울증일 수도 있고,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의 이혼일 수도 있으며 나의 선조들, 혹은 인류가 당한 끔찍한 학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고통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마주할 용기를 갖는 일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동료 인간들과 연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꽤 할만한 일이라고, 감독 제시 아이젠버그는 말하는 듯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영화 <리얼 페인>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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