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의 악기로 거대한 서사를 펼치는 슈트라우스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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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음악을 떠올리면 강렬한 관현악의 색채로 빚어진 교향시와 극적인 오페라 장면들이 먼저 스쳐 지나간다. 그의 대표작인 <돈 후안(Don Juan, Op.2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Op.30)>,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 Op.40)>에서 느껴지는 오케스트라의 찬란한 울림은 그가 음악을 장대하게 만들고 웅장하게 표현하는 데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가 남긴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내림마장조(Sonata for Violin and Piano in E-flat Major, Op.18)>는 더욱 특별하다. 단 두 대의 악기만으로도 거대한 서사를 펼치는 이 곡은,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애틋하게 대화를 이어가며 큰 규모의 관현악곡 못지 않은 화려한 낭만을 선사한다.

1887~1888년, 슈트라우스가 이 소나타를 작곡하던 시기는 그의 음악적 정체성이 형성되던 과도기였다. 당시 그는 아직 교향시 작곡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기 전이었으며, 실내악곡과 관현악곡을 오가며 자신만의 음악 언어를 탐색하고 있었다.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1935)이 그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초상 / 출처. 위키피디아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1935)이 그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초상 / 출처. 위키피디아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 악단의 호르니스트였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Franz Strauss, 1822~1905)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등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음악가들을 신봉했으며, 바그너와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신독일악파(Neudeutsche Schule)’ 작곡가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보인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성장한 슈트라우스의 초기 작품에는 상대적으로 고전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1885년, 저명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의 추천으로 마이닝겐 궁정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의 음악 세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그는 뷜로와의 만남을 통해 지휘자로서의 역량을 키웠으며,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알렉산더 리터(Alexander Ritter, 1833~1896)의 영향을 받아 ‘신독일악파’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됐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점차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스타일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 흐름 속에서 탄생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내림마장조(Sonata for Violin and Piano in E-flat Major, Op.18)>는 슈트라우스가 앞서 작곡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바장조(Sonata for Cello and Piano in F Major, Op.6)>, <13대의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내림마장조(Serenade for 13 Wind Instruments in E-flat Major, Op.7)> 등의 실내악곡과는 다른 음악적 성향을 보여준다. 리듬과 화성의 변화가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으며, 한층 더 대담하고 자유로운 전개가 돋보인다.

[슈트라우스 바이올린 소나타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 Itzhak Perlman의 연주]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는 피아노의 역동적인 선율로 힘차게 시작하며, 이내 바이올린이 합류한다. 곡 전반에서 4/4박자와 3/4박자가 교차하며 유연한 박자의 변화가 이루어져 곡의 흐름에 생동감을 더한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루었던 슈트라우스는 1악장에서부터 두 악기 모두에게 상당한 테크닉과 극적인 표현력을 요구한다. 바이올린은 폭넓은 음역과 도약, 빠른 패시지를 통해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며 피아노 역시 복잡한 코드 진행과 다이내믹한 패시지를 통해 곡의 에너지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이 곡이 단순히 기교적인 화려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드럽게 노래하는 듯한 선율 또한 반복해서 등장하며,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극적인 전개를 형성한다.

‘즉흥곡(Improvisation)’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2악장은 단순히 소나타의 일부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슈트라우스는 이 악장을 별도의 독립된 작품으로도 출판했으며, 이는 곡 자체가 완성도 높은 음악적 깊이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시작하는 이 곡은 중반부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열정적인 대화를 거쳐 곧 부드럽게 긴장을 풀어내는데, 이때 바이올린은 약음기를 끼고 연주하게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애틋하면서도 우아함이 넘치는 이 악장은, 낭만주의적 서정성과 즉흥적인 감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슈트라우스 바이올린 소나타 2악장 Improvisation의 독립 출판본 표지 / 출처. Imslp.org

슈트라우스 바이올린 소나타 2악장 Improvisation의 독립 출판본 표지 / 출처. Imslp.org

[2악장 Improvisation : Andante cantabile]

소나타의 대미를 장식하는 3악장은 Andante로 시작하며, 피아노의 저음 선율이 엄숙하고도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도입부는 마치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느낌을 주는데,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9마디의 짧은 도입부 이후 Allegro로 전환하면서 음악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급변한다. 빠르게 질주하는 바이올린의 선율과 역동적인 피아노 반주가 맞물리며, 슈트라우스 특유의 교향시적 웅장함을 실내악이라는 틀 안에 응축해 낸 듯한 인상을 준다. 중반부에서는 드라마틱한 선율이 펼쳐지다가 경쾌하게 전환되기도 하는데, 마지막에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장대한 피날레를 이룬다.

[3악장 Finale : Andante-Allegro]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가 남긴 마지막 실내악곡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이후 그는 실내악에서 멀어지고 관현악곡과 성악곡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더욱 웅대한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이 바이올린 소나타에는 젊은 슈트라우스의 야망과 낭만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라는 작은 편성 안에서도 그는 풍부한 음악적 색채와 치밀한 서사를 구현해 냈다. 이 작품은 이후 그가 펼쳐 나갈 거대한 음악적 여정의 서막을 알리는 동시에, 그의 열정이 응축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이준화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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