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각국이 줄줄이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는 가운데 영국이 원전 회귀 속도를 올리고 있다. 수년간 미뤄졌던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다시 진행하는 것에 더해 소형모듈원자로(SMR) 도입에도 나서면서다.
5일(현지시간) 폴리티코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영국 정부가 오는 11일 ‘정부 지출 검토’(각 부처 예산을 설정하기 위한 절차)에서 원자력과 관련한 중요 발표를 내놓을 전망이다. 수십억 파운드(수조 원) 규모를 투입하는 SMR 건설 계약과 대형 원자력발전소인 사이즈웰C에 대한 투자 결정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사이즈웰C는 서퍽에 위치한 대규모 원전으로, 개발 구상은 2010년 이뤄졌지만 무려 15년간 사실상 진척되지 않았다. 이번 정부 지출 검토에서 투자 의향을 재확인하며 공공 재정도 배정할 예정이다. 세부 사항은 미리 공개되지만, 최종 승인은 다음달 8~10일 예정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간 정상회담에서 나올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국영기업인 프랑스전력공사(EDF)가 사이즈웰C 원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사이즈웰C에 더해 서머싯에 위치한 힝클리포인트C 원전도 새롭게 건설을 추진 중이다. 두 원전은 각각 600만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
영국 정부는 경제 성장 촉진과 저탄소 에너지원 확대를 목표로 원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스타머 총리는 지난 2월 원전 에너지 확대를 지지하며 “더 저렴한 에너지, 성장과 일자리를 증진할 기회가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왔다”고 말했다.
다만 이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들은 “오랫동안 원자력 문제에 회의적이었던 정부가 더 이상 이를 무시할 수 없어지면서 이번 조치를 취하게 됐다”고 폴리티코에 말했다. 스타머 총리에게 사실상 원전 말고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현재 5개 원자력발전소가 영국 에너지 수요의 15%를 충당하고 있지만, 그중 4곳이 2030년까지 순차적으로 가동을 중단할 예정이다. 힝클리포인트C 사업이 예정보다 6년이나 늦어지면서 그사이 예산이 당초 180억파운드(약 33조1200억원)에서 460억파운드(약 84조6300억원)로 2.5배 넘게 불어나기도 했다. 사업 지연에 따른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신속한 사업 재개가 필요했다는 의미다.
지난달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신속한 SMR 도입에 초점을 맞춘 ‘원자력 르네상스’를 촉구하기도 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영향력도 있다고 폴리티코는 분석했다. 영국 정부가 기후 회의론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법으로 원자력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원자력발전 용량을 2050년까지 현재의 4배로 늘리겠다며 관련 행정명령에 지난달 23일 서명했다.
에드 밀리밴드 영국 에너지안보장관은 지난달 폴리티코에 “원자력과 같은 문제는 우리가 미국과 공조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