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필리핀에서 기승부리는 중국 간첩

1 day ago 6

전현직 장교, 총통 경호부대원들 中 정보 요원에 포섭

필리핀에서 ‘중국 간첩’ 의혹을 받던 앨리스 궈 전 밤반시 시장(주황색 옷)은 지난해 9월 도피 한 달 만에 인도네시아에서 붙잡혔다. GettyImages

필리핀에서 ‘중국 간첩’ 의혹을 받던 앨리스 궈 전 밤반시 시장(주황색 옷)은 지난해 9월 도피 한 달 만에 인도네시아에서 붙잡혔다. GettyImages
대만에서 최근 중국 정보 요원에게 포섭돼 군사기밀을 빼돌린 전현직 공군 장교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총통부를 경호해온 경비부대원까지 적발돼 상당한 파문이 일고 있다. 대만 검찰은 3월 12일(이하 현지 시간) 조종사로 복무했던 스쥔청 전 공군 소령과 요격통제관인 쉬잔청 공군 대위 등 2명을 국가안전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대만 검찰에 따르면 스쥔청 전 소령은 퇴역 후 사업차 방문한 중국에서 정보 요원에게 포섭돼 중국 페이퍼컴퍼니 감사직과 150만 대만달러(약 6600만 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았다.

대만으로 돌아온 그는 2021년 공군 후배인 당시 공군전술통제연대 소속 요격통제관인 쉬잔청 대위를 포섭했다. 두 사람은 중국 전투기의 대만 공역 진입 등에 대한 대만군의 대응 방안, 대만 전투기에 장착하는 슝펑-3 대함미사일 자료 등 군사기밀을 중국에 유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라이 대만 총통 “중국은 적대세력”

대만 검찰은 또 지난해 12월 12일 총통부 경호를 담당하는 헌병 211대대에서 근무했던 전직 부사관 3명과 국방부 정보통신 부대 소속 병사 1명 등 4명을 국가안전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헌병 211대대는 대만에서 최고 정예 부대로 꼽힌다. 이들은 휴대전화로 총통부의 기밀 정보를 찍어 중국 정보 요원에게 총 184만 대만달러(약 8090만 원)를 받고 넘겼다고 한다. 중국으로 유출된 정보에는 총통부 경비 교대 근무표와 각 층 업무 구역, 총통·부총통의 일과 및 휴식 일정 등 기밀 자료가 포함됐다. 중국군은 유사시 대만 수도 타이베이 총통부에 대한 참수 작전을 수행하고자 네이멍구 주르허 훈련 기지에 총통부 모형 건축물을 지어놓고 훈련해왔다. 대만 언론들은 총통부 경비부대 배치 관련 기밀 유출로 총통과 부총통의 안전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대만에서 중국의 간첩 활동이 최근 들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만 정보기관 국가안전국(NSB)이 1월 발표한 ‘중국 간첩 사건 침투 수법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간첩 활동으로 구속기소된 건수와 인원수는 2021년 3건 16명, 2022년 5건 16명, 2023년 14건 48명, 2024년 15건 64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보고서는 지난해 중국 간첩으로 암약하다가 구속기소된 사람 중 현역 군인이 28명, 퇴역 군인이 15명에 달해 전체 3분의 2를 차지한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의 주요 침투 대상은 군부대를 비롯한 정부기관과 비정부단체인 민간협회, 종교단체 등이며 중국 간첩들은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각종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중국의 대만 무력침공 때 적극 협조하라는 임무도 부여받았다고 밝혔다.

중국의 간첩 활동이 급증하자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3월 13일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대만이 직면한 5대 국가 안보·통일전선 위협 및 17개 항 대응 전략’을 발표했다. 라이 총통은 “중국의 침투 및 간첩 활동 위협에 대응하고자 군사재판 제도를 복원하고 군사재판법을 전면 검토할 것”이라면서 “앞으로 현역 군인의 군사 범죄 사건은 군사법원이 담당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만은 2013년 발생한 군내 의문사 사건을 계기로 군인 범죄도 민간 법원에서 재판 받는 내용을 골자로 군사재판법을 개정해 군사재판 제도를 폐기한 바 있다.

라이 총통은 “중국은 이미 ‘역외 적대세력’이 됐다”면서 “지금은 민주주의 회복력과 국가 안보를 강화하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삶의 방식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예방 조치를 취할 때”라고 강조했다. 또 공직자, 교사 등 모든 공무원을 대상으로 본토 신분증·여권·거류허가증 보유 여부를 조사하고, 통일전선 활동 배경이 있는 중국인의 대만 방문을 엄격히 제한하는 등 대만에서 중국인의 통일전선 활동을 금지하는 조치도 내렸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3월 13일(이하 현지 시간)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대만이 직면한 5대 국가 안보·통일전선 위협 및 17개 항 대응 전략’을 발표했다. 뉴시스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3월 13일(이하 현지 시간)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대만이 직면한 5대 국가 안보·통일전선 위협 및 17개 항 대응 전략’을 발표했다. 뉴시스
통화 도청하고 군사기지 드론 촬영까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대립 중인 필리핀에서도 중국 간첩이 잇따라 적발됐다. 필리핀 국가수사청(NBI)은 2월 25일 중국인 2명과 필리핀인 운전사 3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이들은 휴대전화 도청장치 ‘IMSI(국제모바일가입자식별번호) 캐처’를 탑재한 차량을 타고 수도 마닐라 일대 대통령궁, 주필리핀 미국대사관, 필리핀 경찰청 청사, 군사기지 등 민감한 시설의 인근을 운행하면서 통화 내용을 훔쳐 들은 혐의를 받고 있다. NBI는 의심스러운 차량이 돌아다니는 것을 포착한 뒤 수사에 나서 이들을 붙잡았다면서 이들이 데이터 수천 개를 수집했다고 밝혔다.

NBI는 1월 31일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군도·필리핀명 칼라얀군도)의 군 주둔지에 물자를 보급하는 필리핀 선박을 감시한 혐의 등으로 중국인 5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대만인 관광객으로 위장해 필리핀 공군·해군 기지, 해경 함정, 스프래틀리 군도와 인접한 팔라완주 조선소 등을 드론과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NBI는 압수한 드론과 휴대전화에서 군사기지, 해안경비함 등을 촬영한 사진을 다수 확보했다. 로미오 브라우너 필리핀군 참모총장은 “이들이 획득한 정보가 다른 세력의 손에 넘어가면 우리 군기지와 선박이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며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라고 밝혔다.

필리핀 국가수사청이 2월 25일 간첩법 위반 용의자와 이들로부터 압수한 증거를 공개하고 있다. 필리핀 국가수사청 제공

필리핀 국가수사청이 2월 25일 간첩법 위반 용의자와 이들로부터 압수한 증거를 공개하고 있다. 필리핀 국가수사청 제공
미국-필리핀 군사협력에 뿔난 중국

NBI는 1월 21일에도 자국 군사시설 등 중요 인프라를 정찰해 관련 데이터를 중국에 넘긴 혐의로 중국 소프트웨어 기술자 덩위안칭과 필리핀인 운전사 2명을 체포했다. 덩위안칭은 인민해방군 육군공정대를 졸업한 뒤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며 5년 넘게 필리핀에 거주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화교단체 대표 등으로 활동해온 사실이다. 이 단체들은 중국공산당의 해외 통일전선 공작을 담당하는 중화전국귀국화교연합회(ACFROC)의 관리를 받았다고 한다.

2022년 6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취임 이후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유권 갈등이 격화됐다. 미국과 필리핀의 군사협력이 강화되자 중국은 현지 화교 네트워크를 이용해 첩보 활동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은 2023년 미국과의 방위협력확대협정에 따라 미군이 이용할 수 있는 자국 군사기지를 기존 5곳에서 9곳으로 늘렸다. 미군은 지난해 4월 남중국해와 접하고 대만해협과 가까운 필리핀 루손섬에 중거리미사일체계 ‘타이폰(Typhon)’까지 배치했다. 타이폰은 사거리 2500㎞인 토마호크 순항미사일과 SM-6 신형 대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NBI는 3월 8일 자국을 중심으로 동남아 각국에서 활동해온 수백 명 규모의 중국 간첩조직도 적발했다. 이들은 온라인 도박장 등을 통한 사이버 범죄를 포함해 각종 간첩 활동을 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프란셀 파디야 필리핀군 대변인은 “군사시설과 핵심 인프라 시설에 관한 민감한 정보 등이 노출될 경우 국가 안보에 극히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도 “필리핀 군사기지를 염탐하려는 중국 간첩이 크게 늘어나 매우 당황스럽다”면서 “중국 간첩 색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필리핀 정부는 간첩 활동 등 각종 범죄의 온상으로 지적돼온 중국계 온라인 도박장을 폐쇄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으며, 이곳에서 일해온 중국인을 대거 추방하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81호에 실렸습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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