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주일에 '검은 돈' 수십억 세탁…'피싱 돈줄' 된 서울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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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삼동의 한 가상자산 환전소 입구에 ‘테더(USDT)’ 표시가 붙어 있다. 이 환전소는 상품권 업체로 위장하고 범죄 조직의 자금세탁 창구 역할을 하다가 적발됐다.  수원지방검찰청 제공

서울 역삼동의 한 가상자산 환전소 입구에 ‘테더(USDT)’ 표시가 붙어 있다. 이 환전소는 상품권 업체로 위장하고 범죄 조직의 자금세탁 창구 역할을 하다가 적발됐다. 수원지방검찰청 제공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가 국내 불법 자금세탁에 악용되고 있다. 보이스피싱 등 범죄 수익금을 미신고 가상자산 환전소에서 테더로 바꿔 해외로 빼돌리는 게 주된 수법이다. 이런 돈세탁을 돕는 가상자산 환전소가 서울 곳곳에 퍼지면서 범죄수익 환수에 비상이 걸렸다.

[단독] 1주일에 '검은 돈' 수십억 세탁…'피싱 돈줄' 된 서울 도심

10일 경찰에 따르면 국내 전체 보이스피싱 피해액의 70% 이상이 가상자산을 통해 세탁되는 것으로 추정됐다. 현금이나 금 등으로 편취한 자금을 가상자산으로 전환하거나 처음부터 가상자산을 가로채는 방식을 통해서다. 한국경제신문이 경찰청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에 의뢰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대응단 출범 이후 5개월(2025년 11월~2026년 3월)간 전체 피싱 피해액 중 가상자산 직접 편취 비중은 12.9%(1149억원)로 집계됐다.

피싱 범죄조직이 활용한 가상자산 중 테더 비중이 가장 높았다. 분석 기간 가상자산 연계 피싱 범죄 793건 가운데 절반 이상인 405건이 테더를 이용한 범행이었다. 달러 연동이라 가격 변동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해외 지갑·거래소로 빠르게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테더 세탁소’는 명동, 영등포, 마곡, 강남 등 사무공간이 밀집한 서울 곳곳에 퍼져 있다. 피싱 조직원들이 드나들기 편하고 공실이 많아 단기 임차하기 쉬운 오피스텔이나 지식산업센터가 주된 거점으로 쓰인다. 이들은 주로 ‘OO인베스트’ ‘△△트레이딩’ 같은 투자회사 간판을 내걸거나 외관을 상품권 업체처럼 꾸며 검경과 금융당국의 감시를 피한다. 명동의 한 가상자산 환전소는 지난해 5월부터 올해 3월까지 범죄조직의 보이스피싱 편취액을 테더로 바꿔 해외 총책의 전자지갑에 전송하는 일을 대행하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경찰에 따르면 작년 10월부터 6개월간 테더 3113억원어치가 이곳에서 전송됐다.

강형구 한양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테더 환전소는 가상자산을 중개하는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며 “원칙적으로 가상자산사업자로 신고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은 업체는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품권 업체로 위장한 테더 환전소…1주일에 수십억 세탁
마곡·강남 등 거점…'피싱 돈줄' 된 서울 도심

‘테더 환전소’였던 강남 오피스텔 사무실에 새로 입점한 업체가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을 막기 위해 붙여놓은 문구.  최영총 기자

‘테더 환전소’였던 강남 오피스텔 사무실에 새로 입점한 업체가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을 막기 위해 붙여놓은 문구. 최영총 기자

10일 가상자산 투자자 사이에서 ‘테더 세탁소’ 밀집 지역으로 알려진 서울 역삼동 H오피스텔 건물. 이곳 4층에 있는 한 사무실을 찾아가니 “어차피 우리는 테더로 받지 않느냐” “테더가 부족하다”는 등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 직원에게 “테더를 매입하느냐”고 묻자 경계하는 표정으로 “이런 식으로는 거래하지 않는다”며 돌려보냈다. 2층에 있는 한 헤드헌팅 업체는 “현재 사무실이 과거 상품권 업체로 위장한 테더 세탁소였다”며 “요즘도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시로 ‘테더를 환전해달라’며 온다”고 했다.

◇조직원들 수시로 찾아와 환전

이날 경찰 등에 따르면 테더 환전소는 서울 도심 곳곳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주로 명동, 마곡, 구로·가산디지털단지, 강남 일대 지식산업센터에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지역은 사무실이 밀집해 다른 업종으로 위장하기 쉽고, 유동 인구가 많으며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1년간 마곡의 테더 환전소에서 근무했다는 김씨는 “업주가 조폭들에게 대포통장으로 돈을 받고 테더를 내줬다”고 말했다.

이들 환전소가 세탁하는 금액은 많게는 수천억원에 달한다. 수원지방검찰청은 지난해 11월 보이스피싱 수익금 2496억원을 세탁한 혐의로 역삼동 가상자산 환전소 업주를 기소했다. 이 환전소에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하루에도 수차례, 1주일에 수십억원씩 환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단독] 1주일에 '검은 돈' 수십억 세탁…'피싱 돈줄' 된 서울 도심

◇SNS 통해 급속히 확산

일반 가상자산 투자자가 자신도 모르게 범죄수익 세탁에 관여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들이 제공한 테더가 ‘테더 세탁소’에 음성적으로 흘러 들어가서다. 스타트업을 매각해 약 80억원의 자금을 확보한 A씨는 테더 장외 재정거래(무위험 차익거래)에 뛰어들었다. 고객확인의무(KYC) 인증이 완료된 상대방하고만 계좌이체 방식으로 거래하며 주 1~2회 거래를 이어갔고, 건당 1~3% 수준의 수익을 올렸다. 이 같은 방식으로 A씨는 6개월 만에 50억~60억원의 수익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지난해 말 피싱 조직에 연계된 인물과 거래해 경찰 참고인 조사를 받았고, 이후 계좌가 동결됐다.

테더 장외 거래는 SNS를 통해 확산하고 있다. 텔레그램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에는 ‘서울 강남, 3억원 이상 손대손(대면 코인 거래를 뜻하는 은어) 거래만’ ‘USDT 즉시 매입’ 등의 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거래는 주로 직접 만나 현금과 테더를 교환하는데, 거래소를 거치지 않다 보니 고객확인의무나 자금세탁방지(AML) 시스템을 우회할 수 있다.

이날 한 테더 환전업자에게 텔레그램으로 “손대손(대면 코인 거래를 뜻하는 은어) 가능한가요”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3초 만에 답장이 왔다. 이 업자는 “저희는 선릉에 있고 수수료는 1%”라며 “거래는 1000만원 단위로만 한다”고 했다. 1억원 이상 현금 거래를 원한다고 하자 그는 “구매하려면 서울 선릉역 인근 ◇◇오피스텔로 오라”며 접선 장소를 찍어 보냈다. 약속한 시간에 만난 업자는 기자임을 밝히자 황급히 오피스텔을 빠져나갔다.

◇특금법 한계…장외 거래 처벌 ‘난항’

장외 테더 거래의 특성상 실제 수사와 처벌에 한계가 있다. 현행 특정금융정보법은 가상자산 사업자의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미등록 가상자산 사업자를 규제하기 어렵다.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역시 장외거래자들이 “단순 장외거래였을 뿐 범죄자금인 줄 몰랐다”고 주장하면 범죄 인식 여부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경찰이 가상자산 전담 추적·수사팀까지 꾸려 대응에 나섰지만 수사에 어려움이 많다. 테더 거래가 해외 가상자산거래소와 개인 지갑을 거치며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데다 현금 전달책, 환전상, 재정거래 참여자 등이 역할별로 분리돼 있어 범죄 입증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정부가 2022년 3월부터 100만원 이상 가상자산 거래 시 송·수신인 정보를 확인하는 이른바 ‘트래블룰’을 시행하고 있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트래블룰은 자금이 해외로 이동하거나 불법적으로 유용되면 소유주와 실제 사용처를 확인하기 어렵다”며 “규제 대상을 거래소에만 한정하지 말고 중개인과 지갑 서비스 제공자, 환전업자 등으로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류병화/최영총/진영기 기자 hwahw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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