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70주년 때 ‘만선’ 다시 무대 올려
초연 61년 만에 관객 찾아
‘산업화 그늘’ 빈곤-세대 갈등 그려
원작 대사 그대로 살려 재미 더해
극작가 천승세(1939∼2020)의 작품으로 문학 교과서에도 실린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창작희곡 ‘만선’. 올해로 초연 61년을 맞은 이 작품이 6일부터 다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환갑의 세월 동안 내공을 쌓은 ‘만선’은 무얼 가득 싣고 2025년 항구로 돌아왔을까.
●올가미 같은 현실에 맺힌 비극
곰치 일가가 맞닥뜨린 조건은 ‘만선’을 해야만 벗어날 수 있지만, 극복해야 하는 변수는 너무나 많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물고기 떼의 움직임, 몇십 분 단위로도 바뀌는 파도와 바람, 그리고 날씨까지. 그럼에도 곰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만선만 하면 된다, ‘이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불합리한 계약을 받아들인다.
더 빛나는 건 배우들이었다. 배우 김명수는 힘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곰치’의 고집을 잘 보여줬다. ‘구포댁’을 연기한 정경순은 운명의 파도에 휩쓸리며 자식까지 잃는 어머니의 한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악덕 선주 임제순’으로 열연한 원로 배우 김재건의 노련함 역시 돋보였다.
●60년 세월, 삶은 나아졌을까극 중 곰치의 아들 도삼은 “외국 사람들은 배에 기계를 달아 고기 떼를 훤히 보고, 날씨도 탐지한다”며 “원시적으로 고기를 잡으려면 남의 큰 배보다 작더라도 내 배를 타자”고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하지만 곰치는 “뱃놈이 물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 “큰 고기로 만선 하는 맛은 역시 중선배다”라며 이를 무시한다. 급격한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빚어지는 세대 갈등과 빈곤과 같은 비극적인 서민의 현실이 잘 버무려졌다.올해 연극은 굳이 대사를 현대화하지 않고 60년 전 쓰였던 그대로 살려냈다. “쐐기처럼 톡톡 쏜다”, “임제순이 속도 칡넝쿨이제”, “아저씨 넉살엔 얼음 속 굼벵이도 춤춘당께” 등에선 오리지널의 말맛이 여실히 살아있다. ‘만선’의 꿈을 산산조각 낸 폭풍우가 부는 장면은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거센 비바람과 파도가 휘몰아치는 듯 몰입감 있는 연출을 보여줬다.
바뀐 대목도 있다. 시대적 변화에 맞춰 슬슬이나 구포댁 등 여성 캐릭터는 원작보다 훨씬 주체적인 면모를 보인다. 다만, 60년 전 곰치의 모습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의지’와 ‘고난’으로 이해됐다. 하지만 2025년 관객들에겐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는 ‘고집’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30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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