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타임캡슐 속에 '한강 책'… 90년후 세상과 만난다

1 week ago 5

오슬로 '퓨처 라이브러리' 가보니
철통 보안과 정적 속에 잠든
'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2114년 책으로 출간될 예정
100년간 매년 작가 1명 뽑는
프로젝트 총괄 호빈 의장
"한강 작가 원고 건네줬을 때
마치 '한 아기'를 받아든 느낌
우리는 미래·희망 믿어야 해"

퓨처 라이브러리에 보관된 한강의 원고 타임캡슐. 유리가 굴곡져 있지만 'HAN KANG 2018'이라고 적혀 있다.   김유태 기자

퓨처 라이브러리에 보관된 한강의 원고 타임캡슐. 유리가 굴곡져 있지만 'HAN KANG 2018'이라고 적혀 있다. 김유태 기자

본디 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과의 만남을 조건 삼아 태어난다. 작가의 손에서 쓰여 편집자의 눈을 거친 뒤 한 권의 몸을 얻어 잉태된 책은 서점과 도서관에서 '현재의 인간'과 대화한다.

그러나 책의 본질적인 조건인 '현재성'을 뒤집고 현재의 인간이 아닌 '미래의 인간'을 만나기 위해 잠들어 있는 책들의 보관소가 지구 반대편에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 도서관에 조성된 '퓨처라이브러리(Future Library·미래 도서관)'다. 매해 세계적인 작가 1인을 선정하고 그가 쓴 글을 보관하는데, 이 책들은 지금 이 순간 숨을 쉬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대부분 사망한 2114년, 즉 22세기에 출간된다.

그 책들 가운데 한 권이, 바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한강의 2019년 글 'Dear Son, My Beloved(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다.

한강 작가의 2024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을 앞두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르웨이 오슬로로 떠나 퓨처라이브러리를 방문했다. 사후(死後) 출간이란 점에서 한강 작가의 유작(遺作)으로 이미 확정된 책, 현생 인류 대다수가 읽지 못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책, 책의 현재성이란 개념을 전복시키기에 삶의 유한성을 사유하도록 이끄는 그 책은, 두 평짜리 둥근 독방의 한구석에서 홀로 침묵하며 '100년의 긴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한강 작가의 '마지막 책'을 대면하러 떠나는 여정은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오슬로 가르데르모엔 국제공항에서 특급열차 플라이투겟(frytoget)에 탑승해 37㎞ 거리를 18분간 두 정거장 이동하면 오슬로중앙역(Oslo S)에 도착한다. 역에서 걸어 5분 거리인, 2020년에 개관한 신축 도서관의 공식 명칭은 '오슬로 데이크만 비에르비카 도서관'으로 오슬로시(市) 중앙도서관이다. 5분 거리에 오슬로의 명소 뭉크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을 만큼 수도 오슬로의 핵심 요지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오슬로 도서관은 열람석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그러나 이 도서관 5층에 조성된 퓨처라이브러리 안팎은 정적이 흘렀다. 1층에서 천천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까지 가보니 문 입구에 'FUTURE LIBRARY'라 적힌 독특한 디자인의 입구 하나가 발견됐다. 유선형 물결 모양의 독특한 나무 벽으로 세워진 퓨처라이브러리는, 노르웨이 숲에서 자란 나무의 1만6000개 조각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이었다.

퓨처라이브러리 입장엔 제약이 없지만 하나의 규칙이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100년간 살아남을 '책들의 방주' 앞에서 예를 갖추란 의미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고 3m 길이의 복도로 들어가니, 두 평 남짓한 넓이에 층고가 4m쯤 돼 보이는 두 평짜리 '독방'이 눈앞에 황홀경으로 펼쳐졌다. 내부 공간의 나무 벽면도 모두 물결이 흐르듯 유선형이었고, 대여섯 명이 빙 둘러앉아 명상할 만한 벤치가 준비돼 있었다.

퓨처 라이브러리 복도에서 본 내부 모습.

퓨처 라이브러리 복도에서 본 내부 모습.

한강 작가의 글이 보관된 타임캡슐은 입구를 등지고 우측 중앙 부근(약간 아래쪽)에 놓여 있었다. 굴곡진 투명 유리여서 서체가 선명하진 않았지만 'HAN KANG 2018'이란 알파벳이 확실했다. 기자가 셔터를 누르자, 나무 벤치에 앉아 있던 오슬로대 학생 요한손 씨가 "그게 누구의 책이기에 그렇게 사진을 찍느냐"고 물어왔다. "올해 노벨상을 수상한 한국 소설가 한강의 원고"라고 답하니 그녀도 놀란 눈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안네 베아테 호빈 퓨처라이브러리재단 의장은 "2114년 출간될 한강 작가의 책 'Dear Son, My Beloved'가 실제 보관 중인 장소로, 그 방은 '침묵의 방'으로도 불린다"며 "한강 작가는 2020년 도서관 개관 직전에 퓨처라이브러리를 직접 방문했다. 올해 11월 5일엔 퓨처라이브러리 프로젝트의 첫 번째(2014년) 선정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도 이 방을 직접 찾았다"며 웃었다. 마거릿 애트우드 역시 수십 년간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돼 왔다.

한강 작가는 퓨처라이브러리 프로젝트의 5번째 선정 작가다. 아시아 최초였다. 마거릿 애트우드(캐나다), 데이비드 미셸(영국), 숀(아이슬란드), 엘리프 샤팍(터키)에 이어 한강 작가도 오슬로의 선택을 받았는데 당시 한강 작가가 부커상을 받은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2018년). 이후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노르웨이), 오션 브엉(미국) 등이 뒤따랐다.

2022년 선정 작가의 이름에 특히 눈길이 갔다. 한강 작가가 최근 인터뷰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직전에 읽은 책'이라고 소개했던 '잃어버린 책들의 목록'의 저자 유디트 샬란스키(독일)의 이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타임캡슐 속에 원고는 '철통 보안' 속에서 보관된다. 특수 제작된 열쇠로 열어야 한다. 타임캡슐 상하좌우로 빼곡한 나무들은 썩지 않고 100년 이상 견디도록 특수처리됐다고 한다. 누구도 2114년까지 그 글을 읽을 수 없다. 호빈 의장은 "퓨처라이브러리의 타임캡슐 100개는 정확히는 손으로 만든 100개의 유리서랍"이라며 "퓨처라이브러리 원고는 도서관서 9㎞가량 떨어진 '퓨처라이브러리 숲'에 심어진 가문비나무 1000그루를 100년간 키워 책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호빈 의장은 초기부터 퓨처라이브러리 '살림'을 맡아온 인물이다. 다음은 호빈 의장과 나눈 인터뷰 일문일답.

―퓨처라이브러리는 도서관 개념을 뒤집는다. 도서관은 '책과 사람의 만남'을 전제 삼는데, 퓨처라이브러리는 과거의 인간(선정 작가들)과 미래의 인간(22세기 독자들)의 만남을 꿈꾼다.

퓨처라이브러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재정의한다. '100년간 읽히지 않을 책'을 창작하는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완전히 상상할 순 없지만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미래로 시간을 확장해낸다. 인류의 지속성과 예술의 창조력을 둘러싼 '영원성에 관한 투자'이기도 하다.

―'퓨처라이브러리 숲'에 1000그루의 가문비나무를 심었다고 들었다.

기존 도서관처럼 특정 장소에 고정된 것이 아닌, 오슬로 외곽의 작은 숲을 '집단적 인간 문화의 보전과 상징'으로 변모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그 숲은 시간이 흐른 뒤 다음 세기에서 전 세계 작가와 독자들이 만나는 교차점이 된다. 즉각성(immediacy)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연결'을 '가꾸는' 경이로운 프로젝트다.

한강 작가와 안네 베아테 호빈 의장(오른쪽)의 모습.  Kristin von Hirsch·Anne Beate Hovind

한강 작가와 안네 베아테 호빈 의장(오른쪽)의 모습. Kristin von Hirsch·Anne Beate Hovind

―한강 작가는 "언어는 우리를 연결하는 실"이라고 말했다. 이곳에 보관된 작가들의 글도 22세기 독자와 연결될 언어적인 실 같은 느낌이다.

'언어는 우리를 연결하는 실'이란 한강 작가의 말은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고 이해를 증진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 근본적 도구로 작용한다는 점을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개인과 사회 간의 연결을 '엮는' 역할을 한다.

―한강 작가는 2019년 5월 퓨처라이브러리 숲을 방문한 자리에서 하얀 천을 끌며 숲을 걸었다(2018년 선정 작가이지만 행사는 이듬해 봄 진행). 그날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수한 행인들이 하얀 천을 끄는 한강 작가를 뒤따랐다. 당시 한강 작가는 자신의 원고 퍼포먼스를 "숲과의 결혼,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작은 장례식, 세기의 긴 잠을 위한 자장가"라고 은유했다.

그날을 여전히 기억한다. 숲에 도착한 한강 작가는 매우 긴 하얀 천과 함께 걸었다. 우리가 심은 나무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과정은 아름답고 강렬한 경험이었다. 한강 작가가 흰 천으로 감싼 원고를 우리에게 전달했을 때, 그건 마치 '아이'를 받는 것만 같았다. 책임이 수반되는 소중한 보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중인 모든 이를 연결하는, 감동의 한순간이었다.

―도시 오슬로를 상상력 가득한 예술로 채워 미래 세대에 전달하는 일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최근 이곳에 왔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문장을 공유하고 싶다. '예술은 인간의 모든 차원을 통해 우리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인간 본성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며 그사이의 모든 것을 탐험한다.' 난 상상력과 창조력의 힘을 믿는다. 우리는 미래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을 만들어낼 순 있다. 행동은 희망을 만든다. 그 믿음이 날 이끌었다.

―당신은 최근 인터뷰에서 "희망은 있다"고 말했다. "100년 후에도 사람은 존재할 것이고 책은 계속 읽힐 것이기에 희망은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인은 2114년까지 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므로 그 책을 읽지 못한다. 나무를 키우고 원고를 받아 '보지 못할 책'을 계획하는 일은 당신에게 희망을 주는가.

퓨처라이브러리는 우리 시간의 유한성,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을 거란 점(mortality)을 일깨우고 있다. 난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그 순간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아주 오래전에 받아들였다. 다만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난 미래의 인간들을 믿어야 한다. 먼 미래의 그들이 퓨처라이브러리 프로젝트의 마지막 해(2114년)까지 이 프로젝트를 완성해내고 책을 출간하리라 생각한다.

―쓸쓸하고 막막한, 그러나 아름다운 일이다.

매년 퓨처라이브러리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퓨처라이브러리는 나무가 자라듯이 작가의 수가 늘어나고 있고 그래서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 세계, 종교, 민족, 언어를 초월해 사람들과 연결되는 이 프로젝트의 방식은 놀랍다. 그러므로 외롭지 않다. 오히려 풍요롭다고 느낀다.

[오슬로 김유태 기자]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