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온관에 '빛'…한국미술사에 쏜 파격적 장면 [국현열화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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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균의 ‘삼각의 네온’(1970). 네온·PVC·철 등 산업재료를 과감하게 들여 작가만의 입체추상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지금이야 새로울 게 없지만 당시로선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재료와 형식이란 점에서 파급력이 상당했다. 작가는 11점의 네온조각을 만들었고 ‘삼각의 네온’은 그중 초기작이다. 각진 기하학적 형태를 중첩한 모양이 도드라지지만 이후 점차 자유로운 곡선 형태로 변화해 갔다. 추상·팝아트·실험미술 등 새로운 사조가 밀려들던 1970년대 화단의 변화를 낯선 파격성으로 풀어냈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네온조명·나무·아크릴상자, 72×44×3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앞이 꽉 막힌 것 같았다.”

여성 예술가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고모 나혜석(1896∼1948)이 살던 시대나 30년이 지나 그가 살던 시대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작품도 삶도 포기할 순 없었다.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재료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실험을 이어갔다. 한국미술사에 놓인 또 하나의 이름, 나희균(93)이다.

나희균은 1932년 만주 봉천(지금의 중국 선양)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경석은 일본 유학을 마친 뒤 만주에서 사업을 하던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여동생 나혜석이 일본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부친을 설득한 인물이기도 했다. 나희균은 그런 가풍 속에서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여성이 공부한다는 것이 여전히 드문 시절에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족을 따라 서울 종로구로 이주한 뒤 경기여학교에 진학한 나희균은 학교 미술반에서 서양화가 최덕휴(1922~1998)의 지도를 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워갔다. 1950년 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곧 발발한 한국전쟁이 학업을 끊어놓았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한 뒤, 1952년 송도에 재건된 서울미대에서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었다. 1953년 환도 후 졸업장을 받았음에도 실제로 공부한 시간은 1년 반 남짓, 전쟁 속에서 겨우 이어간 대학과정은 만족을 주기엔 너무 짧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이라는 이력도 생겼으나 공허했다.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지만 “내 길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들며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만다.

김환기·이응노보다 먼저 얼어젖힌 ‘파리시대’

1955년 나희균은 결단을 내렸다. 혼자서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환기, 이응노, 남관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 1세대’로 꼽히지만 그들보다 먼저 파리에 도착한 이는 나희균이었다.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기본기를 다진 뒤 에콜 드 보자르(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

당시 파리 화단은 거친 느낌의 추상회화가 득세했지만 나희균의 눈길은 오히려 세잔과 피카소 같은 20세기 초 거장들에게로 향했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언어를 탐색했고 동시에 파리의 현장을 신문 지면을 통해 고국에 전하기도 했다. 파리 베네지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것은 1957년이다. 당시 파리에서 자기 이름을 걸고 그림을 선보인 한국 여성화가는 거의 없었다. 전시장에는 낯선 땅에서 홀로 쌓아올린 치열한 흔적들이 걸려 있었다. 이듬해 그는 파리의 공기를 가득 안고 귀국했고, 바로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두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화가로서의 길은 밝게 빛나 보였다.

나희균의 ‘지붕’(1958).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던 시기 파리국립미술학교 기숙사에서 내려다본 시내 주택가 풍경이다. 고국과는 다른 모양인 지붕과 굴뚝에 매료된 작가는 ‘지붕’ 연작을 제작했다. 한국에선 잘 몰랐던 회색을 발견한 때기도 하다. 흐린 날씨와 건물의 색조에서 처음 회색을 봤고 다른 시대와 다른 문화 느꼈다고 했다. “회색과 검정색도 아름다운 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9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러나 1959년 스물일곱이던 해 동양화가 안상철(1927∼1993)과 결혼을 하며 상황은 달라졌다. 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면서 작업은 뒷전으로 밀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 시대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택한 나희균의 최선이었다.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완전히 붓을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1964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집을 마련하며 방 한 칸을 작업실로 꾸몄고, 틈틈이 뒷산에 올라 풍경을 스케치하고 창작의 불씨를 이어갔다.

결혼 초 나희균이 쓴 일기 같은 글에는 “조금만 머리를 쓰고 능률적으로 일하면 가정생활과 창작을 파탄 없이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보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 나혜석을 두고는 “시대의 희생자”라면서도 고모가 불행했던 이유를 “굳센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가정과 창작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절감하면서도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다짐이 그 냉정한 문장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끝에 드디어 나희균은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조금씩 작업한 결과물을 모아 세 번째 개인전(1970)에 내보였다. 무려 11년 만이었다. 긴 공백이 있었지만 그의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새로웠다. 무엇보다 시선을 끈 것은 네온관과 PVC파이프 같은 산업재료를 사용한 작품이었다(‘삼각의 네온’ 1970). 한국에 불던 건설 붐으로 자재가 산처럼 쌓이던 도시풍경에서 나희균은 “작품의 가능성”을 읽어냈다. 깨지기 쉬운 네온관을 전기와 결합해 빛의 선으로 만들고, PVC파이프를 일일이 절단해 배치했다. 이제껏 한국에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재료였고 파격적인 형식이었다. 전시장에서 네온이 깜박이며 그려낸 빛의 선은 낯설고도 압도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앞이 꽉 막힌 것 같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걸 해봐야겠다”던 결심은 이렇게 전혀 새로운 재료와 형식으로 돌파구를 냈다. 그의 생애, 아니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나희균의 ‘이웃과 함께’(1970). 결혼과 출산, 양육으로 인해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못한 10여년 간의 경력단절을 깨면서 등장한 ‘추상’의 세계다. 네온조각과 탄생시기를 나란히 한 이 회화작품은 작가가 시도한 기하학적 추상으로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작품명대로 사람 사는 사회에서 느끼는 감정,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등은 이후에도 추상회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표현했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6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를 “조용하고 내성적인 여성화가”로만 보던 시선은 단숨에 바뀌었다. 평단은 실험적인 작품의 파격성과 독자성을 높이 평가했다.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등 전위적인 시도가 막 움트던 1960년대 말의 한국화단, 20대 초중반의 젊은 미술가들이 주도하는 실험미술의 장에서 30대 후반의 나희균은 누구보다 신선한 작품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이후 나희균은 다루기 까다로운 네온 대신 철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를 담아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재료였다. 철의 단단함은 그의 강인한 성정과도 닮아 있었다. 20여 년 동안 철판, 철파이프, 철선, 철못을 잇고 겹쳐내며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만들어갔다.

나혜석 재조명도…혈연 의무 넘어 ‘앞선 여성미술가’로

나희균이 한창 작가로 기지개를 켜던 1970년대는 나혜석이 다시 주목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파격적인 삶과 불행한 말년 때문에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 속에 가려져 있던 인물, 나혜석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 무렵 나희균은 고모의 유작을 정리하고 작품의 진위 판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결혼 초기 고모에 대해 ‘의지가 부족했다’며 냉정하게 평가했던 나희균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증언자이자 옹호자로 나혜석의 편에 섰다. 시대를 앞선 여성예술가의 삶을 뒤늦게라도 기리는 작업은 혈연의 의무를 넘어 ‘여성미술가’로 살아온 자신의 자리와 무게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으리라.

나희균의 ‘문-84’(1984). 네온조각 이후 옮겨간 철조각 중 한 점이다. 깨지기 쉽고 보관이 어려운 네온 대신 철판과 파이프, 구리선 등 억척스러운 재료로 단단한 ‘문’을 제작해 세웠다. 철판에 뚫은 작은 구멍 사이를 연결한 선의 반복을 통해 점·선·면이란 기본요소를 다 갖춘 독특한 조형언어를 만들어냈다. ‘한국 현대미술 1세대’로 함께 꼽히는 김환기·이응노·남관 등과는 다른 파격적인 행보였다. 철판·동선·철파이프, 97×73×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93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나희균의 작업은 다시 전환점을 맞았다. 예순을 넘기면서 철 같은 재료를 감당하기에 힘이 부쳤던 것이다. 그는 평면회화로 돌아갔다. 성수대교 붕괴, 항공기 추락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룬 그림은 시대의 아픔에 대한 애도였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업은 창조주를 노래한 신앙고백이었다. 단단한 철을 다루던 손길은 이제 색채의 울림을 만들어내며 보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구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붓을 놓지 않는 나희균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여성예술가가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인내, 성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주목을 받든 그러지

않든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남긴 결과물은 어떤 이름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 힘과 신선함을 지닌다. 미술사의 기록은 늘 주류를 좇았지만, 결국 그 미술사를 풍성하게 한 것은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예술가들이다. 나희균이란 이름을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이유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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