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파 밸리의 두 사슴은 함께 뛴다

4 days ago 9

와인 애호가라면 한 번쯤 나파 밸리의 ‘Stags Leap District’를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두 대표 와인, ‘Stag's Leap Wine Cellars’와 ‘Stags' Leap Winery’를 보고 잠시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철자도 비슷하고 라벨에는 똑같이 도약하는 사슴 그림까지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혹시 한쪽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할 법하지만 놀랍게도 둘 다 실존하는 캘리포니아 명문 와이너리다. 다만 한동안 상표명을 둘러싼 치열한 법정 다툼으로 ‘아포스트로피 전쟁’을 벌였던 앙숙 관계였다는 사실이 와인 역사에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좌] Stag's Leap Wine Cellars 로고 [우] Stags' Leap Winery 로고 / 출처. 각 홈페이지

[좌] Stag's Leap Wine Cellars 로고 [우] Stags' Leap Winery 로고 / 출처. 각 홈페이지

사실 동종 업계에서 비슷한 이름이나 상표를 두고 분쟁이 벌어지는 일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끝나 함께 화합하고 도약하는 경우는 손에 꼽힌다. 이 두 와이너리는 같은 지역,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이름으로 와인 생산을 시작해 오랫동안 법정 싸움을 벌였지만 결국 협력과 공존의 길을 찾았다. 과연 어떤 사연일까?

이름의 유래와 두 ‘사슴’의 탄생

두 와이너리가 자리 잡은 Stags Leap 지역은 이름부터 전설적이다. 옛날 한 아메리카 원주민 사냥꾼이 이곳에서 수사슴(stag)을 쫓았다가 그 사슴이 눈앞의 가파른 절벽(palisades)을 단숨에 뛰어넘어(leap) 달아났다고 한다. 이 놀라운 광경에서 유래한 지명이 바로 Stag's Leap이다. 1970년경, 와인 메이커 워렌 윈이어스키는 이 지역에 와이너리를 세우며 전설 속 사슴의 이름을 따 Stag's Leap Wine Cellars라 명명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카를 도우마니란 인물이 인근에 또 다른 와이너리를 세웠는데 이름을 지역명 그대로 Stags' Leap Winery라고 지었다. 작은 아포스트로피 하나를 제외하면 똑같은 이름의 두 와이너리가 탄생한 셈이다. 초기에는 둘 다 규모가 작고 널리 알려지지 않아 같은 이름 문제로 종종 옥신각신했지만 크게 불거지지는 않고 지나가는 듯했다.

‘파리의 심판’과 아포스트로피 전쟁의 개막

평화롭던 두 와이너리의 관계에 결정적 균열을 가져온 사건이 있으니 바로 1976년의 전설적인 ‘파리의 심판’ 시음회였다. 이 파리의 심판은 와인 역사, 특히 캘리포니아 와인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라 다음에 더 재미있게 다뤄볼 기회가 있겠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에서 Stag’s Leap Wine Cellars의 1973년산 카베르네 소비뇽이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오브리옹 등 프랑스 최고급 보르도 와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캘리포니아 와인이 유럽 명주(名酒)를 꺾은 충격적인 결과에 전 세계 이목이 쏠렸고, Stag’s Leap Wine Cellars는 하루아침에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자 그동안 잠잠했던 이름 분쟁에도 불이 붙었다. 유명세를 타며 가치를 인정받은 Stag's Leap 이름을 둘러싸고 두 와이너리가 본격적인 상표권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출처. Stag's Leap Wine Cellars 홈페이지

출처. Stag's Leap Wine Cellars 홈페이지

소송전은 몇 년에 걸쳐 이어졌다. 먼저 Stag’s Leap Wine Cellars 측이 상대방 이름 사용을 막아달라며 소송을 걸어 1978년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1982년 캘리포니아주 항소법원은 이를 뒤집고, Stag's Leap이라는 지명이 특정 업체만의 상표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쉽게 말해 지명을 딴 상호는 독점권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한편, 이 와중에 Stags' Leap Winery 쪽도 가만있지 않았다. 자기 이름에 들어간 아포스트로피 위치를 강조하려고 표기를 Stags' Leap으로 등록 시도했고, 이 신청은 관련 민사 소송이 최종 종결될 때까지 연기되기도 하였다.

결국 긴 법정 공방은 1986년 캘리포니아주 대법원판결로 마무리되었다. 재판부는 Stags Leap이라는 표현이 지리적 명칭에 불과하므로 어느 한쪽이 단독으로 가질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대신 양측이 처음 사용한 대로 미묘한 차이를 공식 상표로 인정해 주었는데, 즉 Stag's Leap Wine Cellars는 아포스트로피를 S 앞에 붙인 그대로, Stags' Leap Winery는 S 뒤에 붙인 형태로 각각 상표 등록을 허가한 것이다. 그야말로 구두점 하나 차이로 타협을 본 셈이다. 이로써 오랜 아포스트로피 전쟁은 막을 내렸다.

출처. Stags' Leap Winery 홈페이지

출처. Stags' Leap Winery 홈페이지

경쟁자, 협력으로 거듭나다

흥미롭게도, 앙숙이던 두 와이너리는 그 후 예상치 못한 공동 전선을 펼치게 된다. 1980년대 중반, 인근의 파인 릿지(Pine Ridge) 와이너리가 자기 와인 이름에 Stag's Leap을 넣어 출시하려 하자,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두 경쟁자가 손을 잡고 함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공공의 적 앞에서 힘을 합친 격이다. 이 소송은 합의로 마무리되었는데 파인 릿지 측은 결국 브랜드나 와인명에 Stag’s Leap을 쓰지 않기로 하고, 대신 포도밭 지명 표시에 한해서만 아포스트로피 없는 Stags Leap 표기를 허용받았다. 더불어 와인 라벨에 사슴 그림을 넣지 않겠다는 조건에도 동의해야 했다. 오랜 싸움으로 원수지간 같던 둘이 번외 경기에서는 한편이 되어 싸운 셈이다.

공동전선을 펴면서 두 와이너리 사이에도 묘한 우정이 싹튼 것일까. 파인 릿지 사건을 계기로 관계가 한층 부드러워진 두 곳은 급기야 특별한 협업 와인까지 내놓았다. 바로 두 와이너리 각각의 1985년산 카베르네 소비뇽을 정확히 절반씩 블렌딩하여 만든 ‘어코드(Accord)’란 와인이다. 프랑스어로 협정을 뜻하는 이름답게 오랜 갈등을 뒤로하고 화합을 기념하는 상징적 작품이었다.

Stags Leap District / 출처. Stags' Leap Winery 홈페이지 영상 캡처

Stags Leap District / 출처. Stags' Leap Winery 홈페이지 영상 캡처

1989년에는 두 와이너리가 지역 다른 생산자들에 맞서 Stags Leap 지구의 AVA(American Viticultural Area, 와인의 지리적 원산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지역명) 지정을 반대하기 위해 또 한 번 손을 잡았다. 오랜 세월 공들여 쌓아온 이름값이 희석되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즉 그 이전까지는 Stag's Leap 또는 Stags' Leap은 그들의 고유한 상표였으나, Stags Leap이 AVA로 지정이 되면 그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은 누구나 와인 라벨에 지역명으로서 Stags Leap이라고 표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까지 ‘Stags Leap’이라는 간판을 달고 나와 브랜드 이미지에 해가 될지 모른다고 본 것이다. 두 라이벌이 이례적으로 의견을 같이하며 로비에 나섰지만 시대 흐름을 막진 못했다. 1989년 1월 Stags Leap District AVA 지정은 최종 승인되었고, 이로써 누구나 해당 지역 포도로 만든 와인에 Stags Leap을 표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행히 이러한 개방이 두 원조 와이너리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Stags Leap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나파 밸리 최고의 테루아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두 와이너리의 명성도 함께 높아졌다.

나파 밸리가 낳은 걸작 테루아, Stags Leap District

Stags Leap District는 왜 그토록 뛰어난 와인 산지로 명성을 얻었을까? 그 비결은 독특한 지형과 기후의 조화에 있다. 나파 밸리 동쪽 가장자리, 낮은 구릉에 둘러싸인 이 작은 계곡은 한낮에는 뜨거운 캘리포니아 태양이 포도밭을 충분히 달궈주고, 밤에는 산 그림자 덕분에 온도가 뚝 떨어져 포도에 신선한 산도를 불어넣는다. 특히 계곡 동쪽을 병풍처럼 감싼 절벽 팰리세이드(Palisades) 바위산은 낮에 흡수한 열기를 밤에 은은히 내뿜어 포도를 서리로부터 지켜준다. 이렇게 일교차가 큰 이상적인 기후 덕에 포도는 당도와 산미의 완벽한 균형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화산재와 자갈, 점토가 뒤섞인 복합 토양은 와인에 미네랄 풍미와 탄탄한 구조감을 선사한다. 그 결과 Stags Leap의 와인들은 힘차면서도 우아한, 일명 “벨벳 장갑 속 강철 주먹” 같은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다. 진한 검붉은 과실향(블랙 체리, 카시스, 자두 등)에 부드럽고 실키한 탄닌이 어우러져 있으며, 뛰어난 장기 숙성 잠재력을 지녀 10년, 20년 이상 묵힌 뒤에도 풍미가 깊어지고 아름다운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자의 개성, 서로 빛나는 두 별

이제 이 지역의 대표 주자인 두 와이너리는 경쟁을 넘어 서로 다른 강점으로 각자의 빛을 발하고 있다. 먼저 Stag's Leap Wine Cellars는 나파 밸리를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주인공으로, 와인 평론가들로부터 “나파의 1등급(first growth) 와이너리”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76년 파리 테이스팅 우승을 안겨준 S.L.V. 카베르네 소비뇽밭과, 이웃하여 인수한 FAY 포도원에서 나는 포도로 양조한 각각의 싱글 빈야드 와인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두 밭의 정수를 블렌딩한 플래그십 ‘캐스크 23(Cask 23)’은 전 세계 컬렉터들이 찾는 전설적인 나파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랜 소송전의 승자답게 와이너리 공식 명칭에 당당히 ‘Wine Cellars’를 붙이고 현재는 최신식 방문자 센터와 시음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하루 예약제로 개방되는 이곳은 나파 여행객들이 꼭 들르는 순례지로, 역사적인 와인을 맛보며 와인계의 한 획을 그은 순간을 되새길 수 있다.

Stag's Leap Wine Cellars (Tasting Room) / 출처. Stag's Leap Wine Cellars 홈페이지

Stag's Leap Wine Cellars (Tasting Room) / 출처. Stag's Leap Wine Cellars 홈페이지

한편 Stags' Leap Winery는 살짝 느긋하고 은둔자 같은 매력으로 와인 애호가를 끌어당긴다. 울창한 나무와 오래된 장원(莊園)이 어우러진 부지에 자리한 이 와이너리는 19세기 말 건축된 아름다운 저택과 정원이 남아 있어 마치 옛 유럽 귀족의 별장을 찾은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1970년대 카를 도우마니가 방치된 이 유산을 다시 일으켜 세운 뒤, 프티 시라(Petite Sirah) 품종으로 일약 명성을 얻었다. 진한 색과 강건한 풍미의 프티 시라는 당시엔 주로 블렌딩 용도로 쓰이던 비인기 품종이었지만 Stags' Leap Winery가 순수 단일품종 와인으로 선보이며 오히려 컬트적 인기를 끌었다.

와이너리 모토인 “Ne Cede Malis(불운에 굴복하지 말라)”를 이름으로 붙인 프티 시라 ‘네 세데 말리스’는 1929년에 식재된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얻은 포도로 빚어지는데, 지금까지도 Stags' Leap의 상징적 아이콘으로 군림한다. 물론 이곳에서도 카베르네 소비뇽을 비롯한 다양한 나파 품종의 훌륭한 와인들을 만들지만 100년 넘은 포도밭에서 나오는 진득하고 스파이시한 프티 시라 만큼은 다른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특별한 경험으로 통한다. 현재 Stags' Leap Winery는 오스트레일리아 기반의 와인 그룹 TWE(Treasury Wine Estates) 산하에 있으며, 예약을 해야만 소규모 투어와 프라이빗 시음을 제공한다. 덕분에 방문객들은 고즈넉한 저택의 응접실과 꽃향기 그윽한 뒤뜰에서 여유롭게 와인을 음미하며 옛날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다.

Stags' Leap Winery Manor House (Porch) / 출처. Stags' Leap Winery 홈페이지

Stags' Leap Winery Manor House (Porch) / 출처. Stags' Leap Winery 홈페이지

경쟁에서 동반자로, 함께 도약하는 전설

둘 다 이름에 ‘도약(leap)하는 사슴’을 품은 이 두 와이너리는 말 그대로 수십 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함께 도약했다. 격렬했던 상표 전쟁은 이제 역사 속 일화가 되었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 두 업체는 Stags Leap District라는 훌륭한 테루아의 쌍두마차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지금도 가끔 한쪽을 찾아왔다 반대쪽으로 잘못 들어가는 방문객이 있는데, 그럴 때면 양쪽 직원들이 웃으며 서로의 와이너리 위치를 안내해 줄 정도로 사이도 좋아졌다. 어찌 보면 그 옛날 전설의 사슴이 절벽을 날아서 살아났듯이 두 라이벌 역시 갈등을 딛고 함께 비상한 셈이다. 한 끗 차이 이름을 극복하고 나파 밸리의 살아있는 전설로 거듭난 두 와이너리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많은 와인 애호가들의 잔 속에서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

이제 사슴은 함께 뛴다.

한상훈 변호사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