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했으나 부재로 기록된 '읽는 여성들'의 역사
인류 최초의 기록으로 남은 선사시대 동굴벽화. 그 벽면에 찍힌 손바닥의 주인을 우리는 오래도록 '남성'으로 상상해왔다.
그러나 신간 '읽는 여성의 역사'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굴벽화에 남은 손바닥 상당수는 판독 결과 여성의 것이었다. 저자는 손바닥 자국을 바라보며 "그림과 상징을 통해 세상을 읽고 기록해온 능동적 주체"로 여성을 상정한다.
권력이 언제나 남성의 손에 있었기에 여성은 문자의 세계에서 소거된 존재였지만, 이 책은 여성의 지위를 정위치시킨다. 이 책의 전복적인 도입부를 지나면 더 흥미로운 사실이 펼쳐진다.
책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저작권자 역시 여성이었다. 1927년 이라크 남부 우르의 한 유적지에서 석재 원반이 발견됐다. 이 원반엔 남성 세 명의 보좌를 받으며 제례를 주도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원반 뒷면을 살펴보니 문자가 기록돼 있었다. '아카드의 왕, 사르곤의 딸 엔헤두안나, 난나 신의 배우자, 우르의 최고 여사제. 이 원반을 (신께) 바치노라.'
아카드 왕국의 공주이자 여사제였던 엔헤두안나가 이 글의 주인이었던 것. 길가메시 서사시보다 100년 앞선 글이었다. 신에게 말씀을 바친 엔헤두안나는 인류사의 첫머리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이 책에 실린 '읽는 여성'의 초상은 시간에 갇히지 않고 광속으로 이어지는데, 1400년대 폴란드 영주의 딸 나보이카를 다루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나보이카는 책을 읽기 위해 남장을 택했던 여성이었다.
정략결혼을 피할 수 없던 나보이카는 결혼을 앞두고 400㎞ 떨어진 크라쿠프로 향한다. 그곳에서 죽은 오빠의 이름으로 대학에 들어간다. 당시 학문의 전당은 여성에게 굳게 잠겨 있었지만 나보이카는 중저음 목소리를 연습하며 '남장' 대학생으로 공부했다. 라틴어와 토론에 그는 능했다. 훗날 판사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나보이카는 "학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고 책은 전한다.
"나보이카는 책 속에서 자신을 찾았다. 책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원하는 세상이란 남장 따위는 필요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책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고, 문자는 그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다. 손에 열쇠를 쥐지 못하면 다른 세계로의 여행은 불가능하다. 인류사를 추동한 주체는 언제나 울타리 안의 안온한 자가 아니라 울타리 밖을 상상하는 자였다. 금지된 문장을 더듬고 허락되지 않은 세계를 꿈꾸었기에, 오늘 우리는 '상상할 권리'를 자연스럽게 획득했다.
벽화에 남겨진 손바닥이 지워지지 않았듯이 여성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여성은 역사라는 무대에 뒤늦게 초대된 낯선 타인이 아닌 것이다. 손바닥 주인들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존재의 형상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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