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지 마시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발언이 아니다. 2004년 4월 탄핵심판 중이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을 놓고 ‘탄핵정국의 헌법적 해법’을 주제로 고려대 언론대학원이 마련한 조찬강연에서 한 말이다.
물론 윤석열에 대해서도 헌법학의 태두 허영은 언급한 바 있다. 특히 “국회 측이 탄핵소추안의 핵심내용인 ‘내란죄’를 공판 과정에서 뺀 것은 기각사유도 될 수 있지만 각하할 수 있는 사유도 될 수 있다”는 발언은 반탄파(탄핵반대파)로선 귀가 번쩍 트일 일이다.
“‘위법’ ‘불공정’ 투성이…헌재의 尹 탄핵심판을 탄핵해야”
https://shindonga.donga.com/politics/article/all/13/5446993/1법률과 거리가 먼 나는 구순(九旬)을 앞둔 교수님을 대단히 존경한다. 하지만 동의하긴 어렵다. 아무리 절차적 정당성이 중요하대도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가 아님에도 군을 동원해 제 국민에 총부리를 들이댄 대통령을 다시 모실 순 없다. 2004년 허영은 분명 옳았다. ‘경고를 붙인 대통령 탄핵 기각’은 그러나 면죄부만 주었을 뿐, 노무현은 더 강해진 화력으로 돌아왔다. 하물며 ‘윤석열-김건희 공동정권’이 그대로 복귀한다면?
● 노무현은 사과하지 않았다
2004년 5월 14일 헌재는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결정 폄훼 발언, 재신임 국민투표 발언이 모두 법과 헌법에 위배됐지만 “파면할 정도의 중대한 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며 심리 2개월 만에 기각 결정을 내렸다.
다음날 노무현은 대국민 담화에서 “냉정하고 공정한 재판 진행과 마무리에 대해 국민 모두는 높은 신뢰를 보내고 있다”고 헌재를 평가했다. 그러나… 헌재의 ‘경고’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변호인단도 사과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는데 인간 노무현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었다. 그는 국민에게 사과는커녕 고양이 눈꼽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 “탄핵이전으로 돌아간 듯” 여당도 걱정두 주일 만에 동아일보엔 ‘변함없는 노… 야 “역시나”…여 “어쩌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연세대 특강에서 “보수는 힘센 사람이 맘대로 하는 것”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라며 또 설화를 일으킨 거다.
결국 여당 초선 ‘탄돌이’들도 돌아섰다. 2006년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참패하자 성명을 내고 노무현에게 책임을 따졌을 정도다. 그럼에도 노무현은 대선 1년 전부터 한나라당 집권은 끔찍한 일이라는 둥, 여권대통합이 필요하다는 둥 말로써 선거개입을 했다. 한미FTA 체결 등 고인의 공(功)은 인정한다. 그러나 탄핵소추까지 당하고도 “그놈의 헌법”이라며 헌법까지 무시하는 가벼운 언행은 결코 변하지 않았던 거다.
● 박근혜 지금도 “헌재 결정문 납득 못해”
탄핵이 인용됐다고 사람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박근혜는 2017년 3월 10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서 파면됐다. 헌재는 “피청구인이 최순실 씨의 사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하고도 잘못을 숨기고 수사에 불응한 것은 헌법 수호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며 “이에 재판관 전원(8명)의 일치된 의견으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밝혔다.
천만의 말씀이다.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줄을 타고 2015년 4월부터 1년간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으로서 ‘문화계의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은 2016년 12월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나와 “대통령과 최 씨가 같은 급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최순실-박근혜 공동정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의 질문에 “그렇게 생각했다”고 답했다. 최순실로부터 요청받고 추천해준 문화체육부 장관과 교육문화수석 등이 그대로 임명되는 걸 보고 ‘공동정권’이라 생각했다는 거다.
●‘적폐청산의 칼’에 무너진 문재인
탄핵이 기각되든, 인용되든, 전현직 대통령들만 안 변하는 게 아니다. 대선주자도, 즉 탄핵이 인용됨으로써 대선주자에서 대통령이 된 사람 또한 징하게 안 변한다.
2017년 대선주자 선두였던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문재인은 줄곧 ‘적폐청산’을 강조했다. 헌재 결정 이틀 뒤 첫 기자회견에서도 “적폐를 확실히 청산하면서 민주주의 틀 안에서 소수의견도 존중하는, 원칙 있는 통합이 중요하다”고 했다. 물론 집권하면 ‘대탕평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했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잠깐은 ‘통합’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래도 대선 공약집에 기록된 제1공약은 역시 적폐청산특별조사위원회 설치였다.
적폐청산용으로 시퍼렇게 날을 벼린 윤석열 검찰은 그러나 멈출 수 없는 권력이었다. 칼끝이 ‘살권수(살아있는 권력 수사)’로, 법무부 장관 조국으로, 청와대로 향하면서 마침내 윤석열 자신이 야당 대선 후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탄핵심판대에 선 두 번 째 보수정당 대통령 신세다.
●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윤석열 역시 입때껏 승복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최후진술에서 탄핵이 기각될 경우, 임기 단축 개헌 추진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그러나 설령 대통령직에 복귀해 개헌안을 내놓은들, 그가 ‘반국가세력’ ‘내란 공작 세력’이라고 폄훼한 거대야당이 그 개헌안에 동의할 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당장은 탄핵만 기각(또는 각하)되면 뭐든지 할 듯싶지만, 막상 그렇게 된다면 그 좋은 대통령 자리를 스스로(특히 김건희가) 임기 전에 내려올 것 같지가 않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를 통틀어 영원하고도 궁극적인 정치적 문제는 ‘통제를 행하는 자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였다. 생물학자 제임스 웰스의 ‘인간은 어리석은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21세기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이 다시 돌아와 똑같은 ‘통치’를 할까 봐 두려울 줄은 정말 몰랐다. 럭키비키 그 대통령이 파면된대도 나라를 ‘일극체제’ ‘전체주의’로 만들 유력 대선주자 때문에 공포스러울 줄은 진정 난 몰랐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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