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성역할 고정관념 '유리벽'부터 깨야

9 hours ago 1

김상경 여성금융인네트워크 회장

  • 등록 2025-07-04 오전 5:00:00

    수정 2025-07-04 오전 5:00:00

[김상경 여성금융인네트워크 회장] 이제 금융권에서 여성은 더는 소수자가 아니다. 전체 종사자 중 여성 비율은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 그러나 리더의 자리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본시장법 개정 이후 등기 임원 중 여성 비중은 4.6%에서 지난해 기준 12.5%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98%가 사외이사였고 사내이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숫자 속 현실은 여전히 냉정하다. 이는 금융권 내 여성의 리더십 진출을 가로막는 구조적·문화적 장벽이 여전히 견고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 여성금융인네트워크가 금융권 중간 계급의 종사자 14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는 이 점을 수치로 입증한다. 조사에서 가장 먼저 지적된 문제는 조직 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성차별적 문화였다. 특히 특수은행과 증권사에서 이런 인식이 강하게 나타났고 시중은행은 중간 수준, 외국계 은행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여성 관리자 다수는 ‘유리천장’에 앞서 ‘유리벽’(Glass Wall) 현상을 더욱 실감하고 있었다. 특정부서에 머무르며 주요 직무에서 배제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핵심 보직에 대한 접근 기회 부족, 비공식 네트워크에서의 소외, 멘토 부재는 여성 승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조직문화에 대한 신뢰 수준 역시 여성 임원 비율과 비례했다. 여성 임원이 10% 미만인 조직에서는 인사 제도가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강했고 10% 이상인 조직은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았다. 숫자는 곧 신뢰의 기준선이었다. 일과 가정의 이중 부담은 여성 리더가 공통으로 꼽은 가장 큰 지속가능성 저해 요인이었다. 직급이나 조직 성격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여성 응답자가 이 문제에 깊이 공감했다.

이번 조사는 여성이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가 능력 부족이 아닌 ‘기회의 문’ 자체가 열려 있지 않기 때문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변화의 방향도 분명하다. 성별 불균형 보직 개선, 핵심 부서 기회 확대, 성과 중심 인사, 리더십 교육, 육아 부담 완화, 여성 리더 40% 목표 설정 등이다. 특히 여성 리더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조직일수록 승진 기회가 유의미하게 높았다. 결국 제도와 조직의 ‘의지 있는 개입’이 변화를 만든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변화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결단하고 실행해야 할 시점이다. 고위층의 다양성과 포용성은 이제 기업 윤리를 넘어 한국 금융산업의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핵심 전략이다. 지난 2016년 영국 정부의 재무부가 주도한 ‘여성 금융인 헌장’(Women in Finance Charter)을 주목할 만하다. 이 헌장은 금융사가 자율적으로 여성 리더 비율 목표치를 설정해 외부에 공개하고 목표에 미달하면 그 사유를 설명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다. 무엇보다도 이 제도는 정부의 강제 없이 ‘정책 유도’만으로도 금융권 내부의 자발적 개선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새 정부는 여성 리더 확대를 금융산업의 고부가가치 창출 전략이자 국가 경쟁력의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기술과 규제가 급변하는 오늘날 다양한 관점을 지닌 리더십의 구조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핵심 자산이기 때문이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