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1917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부부인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생활하던 창덕궁 내전에 큰불이 나 건물이 모두 탔다. 3년 간의 공사를 거쳐 1920년 건물을 재건하면서 전각 내부를 장식하는 대규모 벽화가 함께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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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개관 20주년 특별전 ‘창덕궁의 근사한 벽화’ 전시장. (사진=국가유산청) |
국립고궁박물관이 올해 개관 20주년을 맞아 조선왕실의 마지막 궁중회화인 창덕궁 벽화를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다. 14일부터 10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는 특별전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를 통해서다.
개막 전날인 13일 언론공개회를 통해 이번 전시를 미리 보고 왔다. 이번에 공개되는 창덕궁 벽화는 높이가 각각 180~214㎝, 너비가 각각 525~882㎝에 달하는 대작들이다. 벽에 직접 그린 것이 아닌, 비단에 그린 뒤 종이로 배접하고 이를 벽에 부착한 ‘부벽화’(付壁畵)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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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희정당 벽화 해강 김규진의 ‘총석정절경도’(위쪽), ‘금강산만물초승경도’. (사진=국가유산청) |
거대한 규모만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작품들로 진경산수화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은 국립고궁박물관이 2013년부터 보존처리를 거쳐 소장하고 있는 원본이다. 현재 창덕궁에서 만날 수 있는 벽화는 모사본(원본을 본떠서 베낀 것)과 영인본(원본을 고화질 사진 또는 스캔으로 복제한 것)이다.
전시는 2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순종의 접결실이었던 희정당 벽화, 황제 부부의 침전인 대조전 벽화, 서재 겸 휴식공간이었던 경훈각 벽화를 각각 분리된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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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 벽화 정재 오일영, 묵로 이용우의 ‘봉황도’(위쪽), 이당 김은호의 ‘백화도’(가운데)와 ‘백화도 초본’. (사진=국가유산청) |
희정당 벽화는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직접 금강산을 유람하며 그린 ‘총석정절경도’, ‘금강산만물초승경도’이다. 금강산이 궁중회화 소재로 등장하는 흔치 않은 사례다. 박물관 측은 “금강산이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영험한 산으로 여겨지면서도 일제에 의해 관광지로 활발히 개발됐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대조전 벽화는 정재 오일영(1890~1960)과 묵로 이용우(1902~1952)가 합작한 ‘봉황도’, 이당 김은호(892~1979)가 그린 ‘백학도’다. 궁중회화의 단골 소재로 태평성대화 부부의 화합을 상징하는 봉황, 십장생 중 하나인 학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은호가 ‘백학도’를 구상하며 제작한 ‘백학도 초본’도 최초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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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경훈각 벽화 심산 노수현의 ‘조일선관도’(위쪽), 청전 이상범의 ‘삼선관파도’. (사진=국가유산청) |
경훈각 벽화도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것들이다. 심산 노수현(1899~1978)의 ‘조일선관도’,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삼선관파도’다. 특히 이들 작품은 속세를 벗어난 신선들의 세계를 그려 눈길을 끈다. 장수를 상징하는 선계의 복숭아와 거북을 든 동자, 서로 나이를 자랑하는 세 명의 신선들은 황제 부부의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 벽화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화가 본인의 이름과 함께 ‘삼가 그린다’는 뜻의 ‘근사’(謹寫)를 벽화에 적었다는 것이다. 전시 제목을 ‘창덕궁의 근사한 벽화’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홍주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기존의 궁중 화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적은 적이 없다”며 “화가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황제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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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 ‘근사한 벽화, 다시 깨어나다’. (사진=국가유산청) |
2부에서는 창덕궁 벽화를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 ‘근사한 벽화, 다시 깨어나다’가 펼쳐진다. 16m에 달하는 대형 미디어아트로 벽화 속 금강산과 봉황, 학의 모습이 관객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실감영상으로 펼쳐진다.
정용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벽화는 전통적인 궁중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근대적인 섬세하고 화려한 필치가 함께 녹아들어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조선왕실의 마지막 궁중회화”라며 “예술적 탁월성을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작품들을 박물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한자리에 모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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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재 국립고궁박물관장이 13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창덕궁, 근사한 벽화’ 언론공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