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안은 황금빛 관능, 그림 밖은 서투른 하트 [화폭역정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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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1902). 무수히 그린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 중 가장 독보적이고 특별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화려한 욕망을 상징하는 황금빛 대신 신비롭고 깊은 청색을 사용해 평생의 동반자였던 에밀리 플뢰게를 향한 클림트의 존경·사랑을 담아내서다. 에밀리가 직접 디자인했다는 푸른 드레스를 내세워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빼버리고 도도하면서 지적인 여성의 모습을 구현하려 했다. 하지만 정작 플뢰게는 이 초상화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옷의 문양과 배경이 너무 튀었기 때문이란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캔버스에 유채, 181×84㎝. 빈박물관(오스트리아 빈)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 빈 예술계의 정점에 서 있었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인터뷰 요청은 다 거절했고 자신의 예술관을 글로 쓰는 일도 없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저에 대해 알고 싶으면 제 그림을 보면 됩니다.”

클림트를 직접 만난 이들은 화려한 작품과 반대로 보이는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새벽부터 작업실에 나와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고, 헐렁한 작업복 차림은 화가라기보다 토지를 일구는 농부나 그물을 정리하는 어부를 떠올리게 했다. 오로지 묵묵하게 화면을 채우는 일, 클림트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클림트는 1862년 빈 외곽 바움가르텐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생계가 불안정한 수공예 장인이었고, 일곱 남매 중 둘째인 클림트는 어린 나이부터 집안 살림에 보탬이 돼야 했다. 빈 공예학교에 진학한 것도, 졸업 후 곧바로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친구 프란츠 마치와 공방을 차린 것도, 처음부터 예술을 생존의 수단으로 인식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가 1892년 몇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자 클림트는 온 가족을 돌보는 생계의 전선에 나섰다.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또 동생 에른스트의 부인과 조카딸까지 부양했다. 그의 삶은 의무로 촘촘히 짜여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유세하거나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파리의 인상주의자들이 카페에 모여 앉아 예술의 미래를 논했을 때조차 클림트는 당장 눈앞의 생존을 위해 주문받은 벽화를 그리고 또 그려야 했던 것이다.

금세공사 아버지 도우며 몸에 밴 ‘금빛’ 발판으로

그 치열한 노동의 시간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클림트의 독창적인 미학이 싹텄다. 다름 아닌 황금빛이었다. 황금빛은 차가운 소멸의 공포로부터 삶을 지켜내려는 주술적 의식이자 언젠가 부서질 인간의 필멸성에 덧씌운 영원의 장막이었다. 파리의 인상주의자들이 찰나의 빛을 좇을 때 빈의 어둠 속에서 영원한 황금빛을 만들어내던 클림트는 서른아홉 살에 마침내 ‘유디트 I’(1901)을 세상에 드러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대개 결연한 의지를 품은 엄숙한 도덕적 상징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클림트의 붓끝에서 유디트는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술에 취하게 한 뒤 목을 베어 이스라엘을 구한 여인이다. 전통적으로 이 스토리는 영웅서사로 표현됐지만 클림트의 유디트는 쾌락의 화신처럼 보인다. 당대 빈은 이 그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죽음과 관능이 포개진 화면 속에서 황금빛에 둘러싸인 유디트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의문은 커져갔다. 금빛을 물감으로 재현한 것도 아니었다. 아예 금박지를 통째로 붙여버렸는데, 그런 작품 앞에서 다들 이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I’(1901). 클림트가 ‘황금빛 화가’로 불린 시작점이 된 작품이다. 수많은 고전화가가 정의롭고 비장하게 그려왔던 성녀 ‘유디트’를 성적인 황홀경에 빠진 관능의 여인으로 뒤바꿨다. 구약성경 속 유디트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술로 유혹한 뒤 목을 벴고, 그림 속 유디트는 그 적장의 머리를 허리춤에 들고 있다. 금속공예가이던 친동생 게오르크 클림트에게 입체적인 금빛 금속 액자를 제작하게 했고 상단에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를 새겼다. 캔버스에 유채·금박, 84×42㎝. 벨베데레미술관(오스트리아 빈) 소장.

사실 금빛에 대한 감각은 클림트의 몸에 배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금세공사인 아버지의 작업대 곁에서 일을 도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유디트 I’ 이후 클림트는 금빛을 화면 전체로 확장시켜 나갔고, 세상은 그를 ‘황금의 화가’라 부르기 시작했다. 황제와 성인을 위해 물감에 갈아넣어 사용하던 금빛이 클림트의 손으로 옮겨가며 인간의 욕망과 죽음이란 의미로 되살아났다.

황금 여인들과 달라…관능의 흔적 뺀 플뢰게 초상

그런데 바로 이듬해 클림트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1902)이다. 같은 화가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금빛이 아니라 청색이다. 청금석 빛이 물결치는 드레스가 화면을 이끌고, 주인공은 그 중심에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전까지 다른 여인들을 황금빛 욕망 속에 결박된 모습으로 그렸다면, 이 초상만큼은 금빛을 뺀 본연의 모습으로 그렸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걸까.

에밀리 플뢰게(1874∼1952)는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의 부인 헬레네 플뢰게의 여동생이다. 에른스트가 세상을 떠난 뒤 클림트는 그 가족까지 돌봤고 플뢰게 집안과도 친밀하게 지내게 됐다. 당시 열여덟 살이던 플뢰게에게 서른 살의 클림트는 삼촌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이 처음 가까워진 계기는 플뢰게가 프랑스어를 함께 배우자고 제안하면서였다. 낯선 언어를 함께 배우는 순박하고 유익한 시간이 지나고 이 둘은 깊은 정신적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플뢰게는 두 언니와 함께 패션살롱 ‘플뢰게 자매’를 운영한 뛰어난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였다.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에서 입은 옷도 바로 플뢰게 자신이 디자인한 드레스다. 몸을 옥죄는 코르셋을 버린 혁신적 실루엣으로 당대 여인들의 유행을 주도하며 자유를 외친 당당한 디자이너였다. 클림트는 그런 플뢰게를 신뢰하고 아꼈다.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오른쪽)와 에밀리 플뢰게. 두 사람이 입은 헐렁한 옷은 플뢰게가 디자인했다. 1900~1905년 어느 때로 추정하지만 사진을 찍은 이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클림트는 플뢰게에게 평생 한 번도 청혼하지 않았고 ‘사랑한다’는 가벼운 속세의 한마디 고백도 차마 건네지 못했다. 클림트의 일상이 모델과의 사이에 무수한 사생아를 둔, 스스로 결박한 운명의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결한 플뢰게를 자신의 구차하고 진흙투성이인 삶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플뢰게가 일군 크고 작은 성공을 망가뜨릴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옷에 패턴을 그려주거나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망정 클림트는 플뢰게의 인생에 그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

서양화에서 청색은 성모 마리아의 색이다. 황금보다 더 정신적이고, 황금보다 더 내면적인 색이다. 유디트의 황금이 욕망의 언어라면, 플뢰게의 청색은 신비의 언어다. 클림트는 황금빛 화면 속에 반쯤 녹아들던 다른 여인들과 달리 플뢰게에게는 관능의 흔적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생아 줄줄이…윤리관 의심 받아도 플뢰게엔 한 마음

클림트가 사망하기 한 달여 전인 1917년 12월 30일 쓴 마지막 편지에는 이런 문구가 보인다.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정말 절실히 필요한, 가장 행복한 새해가 되기를.” 클림트는 새해 인사를 개인의 안녕이 아니라 공동의 운명으로 전했다. 그러곤 이듬해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의식을 겨우 되찾고 일그러진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에밀리가 와야 해”였다. 그 소식을 듣고 플뢰게가 한달음에 클림트의 병상을 찾았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이후 클림트는 쓰러진 지 2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클림트가 플뢰게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는 400통 가까이 남아 있다. 먼 도시로 떠날 일이 있는 날이면 하루에 여덟 통까지 써 보내기도 했다. 클림트가 죽은 뒤 플뢰게는 그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는 모두 불태웠다. 하지만 클림트에게서 받은 편지와 엽서는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세상에 남은 400통의 편지와 엽서는 플뢰게의 사후에 공개된 것이다. 20년 넘게 플뢰게에게 보냈던 서신들에는 클림트의 자잘한 일상이 담겨 있다. 열차시간 등의 메모가 주로 남아 있고, 끼적거린 시도 있으며, 무려 ‘날개 달린 하트’를 그린 그림도 있다.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클림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플뢰게와 공유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구스타프 클림트(왼쪽)와 에밀리 플뢰게. 1909∼1910년경 클림트 가족과 플뢰게 가족이 함께 휴가를 갔던 오스트리아 아테제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는 중이다. 먼 곳을 바라보며 노를 젓고 있는 클림트 뒤로 환하게 웃고 있는 플뢰게가 섰다. 두 사람이 입은 헐렁한 옷은 플뢰게가 디자인한 것이다. 사진을 찍은 이는 알 수가 없다.

화면 속에는 황금빛 욕망과 죽음을 다뤘지만, 화면 밖에서는 열차를 자주 놓쳤고 서툰 시를 썼으며 날개 달린 하트를 그렸다. 물론 그림 앞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언어를 지켜낸 클림트의 삶이 일관성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은 분명히 있다. 수많은 모델과의 관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의 존재는 세기말 빈의 퇴폐적 분위기를 고려하더라도 클림트의 윤리관을 의심하게 만든다. 다만 그의 일생에서 일관된 한 가지는 플뢰게에 대한 마음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깊이 간직한 그 마음이 클림트를 살아가게 한 중심이었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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