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美 장기호황 비결은
IT투자가 만든 무형자산축적
AI시대 ‘솔로우 역설’ 풀려면
조직내 AI 확산·흡수가 관건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부음 기사를 접하며 2명의 경제학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한 명이 2003년 뉴욕 연수 때 종종 만났던 한국인 교수여서 더욱 그랬다. 이들은 그린스펀이 1990년대 미국의 최장기 호황을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경제학자들이다.
논쟁의 불은 로버트 솔로 MIT 교수가 붙였다. 1987년 뉴욕타임스 북 리뷰 기고문에서 그는 “컴퓨터 시대는 도처에서 볼 수 있지만, 정작 생산성 통계에서만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기업들이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ICT) 구축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지만, 생산성 증가율은 오히려 정체되거나 뒷걸음치는 현상을 꼬집었다. 이른바 ‘솔로 역설(생산성 역설)’이다. 경제성장론의 대가이자 그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한마디였으니 울림은 꽤 컸다.
1990년대 후반 들어 그린스펀은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실업률이 4%로 떨어지는 호황이 이어지자 물가 급등을 우려한 주류 경제학자들이 선제적인 금리 인상을 촉구했다. 실업률이 떨어지면 물가가 오른다는 ‘필립스 곡선’이 이론적 근거였다.
하지만 그는 IT 혁신에 따른 구조적인 생산성 향상이 물가 상승 압력을 흡수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확신했다. 다만 솔로 역설을 뒤집을 이론적 모델과 실증 결과가 없었다.
이때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연구 결과를 잇달아 발표한 학자가 있었다. 최근 ‘AI 경제학’을 주도하는 에릭 브리뇰프슨 스탠퍼드대 교수와 2005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양신규 MIT 교수다.
당시 MIT 교수와 박사과정 학생으로 만난 이 둘은 학계 최대 화두였던 솔로 역설을 정면으로 다뤘다.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인 양신규는 브리뇰프슨 연구에 방대한 실증분석으로 힘을 보탰다.
양신규는 이미 MIT 슬론 경영대에서 쓴 1994년 석사학위논문이 히트를 쳐 유명한 대학원생이었다. 기업들의 IT투자효과가 기존 생산성 통계지표에는 잡히지 않지만, 월가의 주식시장에서는 프리미엄을 주고 거래하고 있음을 측정해냈다. 이론은 있었지만 양신규가 수백개 기업의 실제 데이터로 이를 검증했다.
브리뇰프슨은 훗날 양신규 추모글에서 “1994년, 그는 MIT 슬론 경영대학원 역사상 최고의 석사 논문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제출했습니다.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논문은 단 24페이지 분량이지만, 제가 읽어본 석사 논문 중 가장 심오하고 독창적인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논문은 학장과 노벨상 수상자가 IT에 대해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라고 했다. 노벨상 수상자는 솔로를 말한다.
브리뇰프슨과 양신규는 공동논문을 통해 거시 통계가 아닌 개별 기업 단위의 미시적 통계로 실증 검증해보면 솔로의 생산성 역설은 이미 깨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기업이 IT에 1달러 투자할 때 주식시장 기업가치 평가는 10달러 증가한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기존 연구에서는 비용으로만 인식해 놓쳤던 IT 투자에 따른 무형자산의 축적 과정을 실증적으로 찾아냈다. IT 투자가 생산성을 끌어올린다는 이론적·실증적 근거를 제시했다.
확신을 얻은 그린스펀은 “당장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매파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생산성 향상이 인플레이션을 완화할 수 있다고 봤다. 조급한 금리 인상으로 성장의 싹을 자르는 우를 피한 셈이다. 두 교수의 연구 결과는 그린스펀에게 완벽한 방패가 됐다. 그린스펀은 의회 증언과 콘퍼런스 공개연설에서 이들의 연구 결과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공식 통계에는 무형의 조직자본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생산성 지표가 낮게 나오는 착시가 있으며, 실제로는 IT 혁신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만큼 충분한 잠재 생산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논리였다. 당시 그린스펀이 몇 차례 불러 점심을 같이했다는 양 교수의 얘기도 생각난다.
AI 혁명으로 또다시 솔로 역설 논쟁이 뜨겁다. 대런 애쓰모글루 MIT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향후 10년간 AI가 생산성에 미칠 영향은 1%도 안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브리뇰프슨은 대규모 투자로 형성되는 무형자산이 충분히 축적되면 본격적으로 생산성이 상승한다는 ‘J커브’ 이론으로 맞섰다.
하지만 두 석학의 처방은 한곳으로 모인다. 애쓰모글루 주장처럼 단순히 인건비를 깎기 위해 AI로 사람을 대체한다면 생산성 증대 효과가 미미하겠지만, 브리뇰프슨 처방대로 사람과 조직에 충분히 확산·흡수될 수 있도록 투자한다면 폭발적인 성장을 마주할 수 있다.
많은 엔지니어와 기업들이 인간을 똑같이 흉내 내고 대체하는 AI(인간 모방형 AI) 개발에 집착하는데, 브리뇰프슨은 이를 ‘튜링 함정(Turing Trap)’이라고 경고한다. 브리뇰프슨과 양신규의 연구를 현재의 AI에 대입해서 풀이해보면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을 대체(Automation)하는 AI는 노동자의 협상력을 떨어뜨리고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지만, 인간의 능력을 증폭(Augmentation)하는 AI는 인간을 대체 불가능하게 만들어 임금과 고용을 모두 높인다.”
때마침 브리뇰프슨 교수가 9월 세계지식포럼 연사로 한국을 처음 찾는다. AI가 실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려면 국가와 기업은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을 제시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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