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사찰하던 동독 정보원
남몰래 눈감아주고 보호해
감청·감시 장면 생생히 묘사
타인 알아갈 때 나도 이해받아
1월19일까지 LG아트센터
“자기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지 않을까?”
엄혹한 전체주의 속에서 피어난 인간애를 그린 연극 ‘타인의 삶’(연출 손상규)이 공연 중이다.
‘타인의 삶’은 동독 정부를 위해 고문도 서슴지 않던 비밀경찰 비즐러(윤나무, 이동휘)가 반체제 극작가 드라이만(정승길, 김준한)을 감시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연극은 국가보위부(슈타지) 비밀경찰들이 드라이만의 삶을 감시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연출한다. 드라이만 역을 맡은 배우가 무대에서 말을 하면 비즐러 역 배우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그를 따라다닌다. 애인과의 일상부터 서독 인사들과 내통하는 비밀 대화까지 드라이만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청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비즐러 역을 맡은 배우가 드라이만 역 배우에게 지근거리에서 그림자처럼 밀착하는 모습은 피감시자의 삶에 감시자가 깊숙히 몰입하는 것을 드러낸다.
비즐러는 무대 위 인물들의 삶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서술자의 역할도 한다. 비즐러는 인물들을 관찰하면서 자신히 작성해서 낼 감시 보고서의 내용을 대사로 발화하는데, 이는 인물들의 표면적 상황과 비즐러의 내적 심리를 관객에게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또한 앞서 감시자(비즐러)와 피감시자(드라이만)가 그랬듯이 비즐러(서술자)와 관객 간 심리적 거리를 가깝게 만든다.
사회주의 정권의 하수인인 비즐러가 인간에 대한 애정에 눈울 뜬 것은 드라이만의 삶에 깊숙이 빠져들어 그의 생각과 열정에 공감하게 됐기 때문이다. 드라이만은 서방 세계에도 이름일 알려질 만큼 뛰어난 작가지만 어떤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연출자가 누구이고 어떤 배우가 배역을 맡을지 등을 권력자들이 좌우하는 현실에 회의를 갖고 있다. 드라이만의 연인인 배우 크리스타(최희서)는 문화부 장관 햄프에게 배우의 커리어를 미끼로 성폭력을 당하고, 드라이만의 친구이자 재능 있는 연출가인 예르스카는 권력자의 눈밖에 나 수년간 작품을 못 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다.
연극은 냉혈한인 비즐러가 인간애를 되찾는 과정을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시로 표현한다. 크리스타와 예르스카에게 정부가 저지른 폭력을 알게 된 비즐러는 죽은 예르스카가 드라이만의 집에 남긴 브레히트의 시집을 낭독한다. “우리 위, 여름 하늘에/한조각 구름이 내 시선을 잡았네.//하얗고 아주 높이 떠있는 구름/그리고 내가 다시 올려다 봤을 떄, 구름은 더 이상 거기 없었네.”
예르스카의 죽음으로 분노한 드라이만이 서방 세계에 동독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려 하면서 연극은 위기로 치닫는다. 드라이만을 감시하던 비즐러는 그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보고서를 거짓으로 작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그를 비호한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다는 느낌은 나 자신이 타인을 알아갈 때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면 나 자신도 그 사람에게 이해와 지지를 받는 듯한 감정이 든다. 비즐러가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드라이만을 남몰래 보호한 것은 드라이만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의 생각과 열정에 깊은 공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 부분, 독일이 통일된 뒤 드라이만이 비즐러에게 헌정하는 선물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결국 쌍방향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드러낸다. 1월19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