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카타르, UAE 등 아랍 부국들
현란한 외교로 궁지 몰린 트럼프 홀려
美 항공기 구매 등 ‘구매 외교’ 넘어
미국의 부족한 힘 채우는 ‘중재 외교’
日 특유의 ‘아부·극진 외교’까지 강화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바꾼 힘의 역학
트럼프에 초밀착해 불균형 충격 대응
일본이 자랑하는 아부 외교는 저리가라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중동의 부국들이 석유로 쌓은 이른바 ‘구매력 과시’ 외교에 더해 상대의 환심을 사는 ‘아부’ 외교,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중재’ 외교까지 더하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홀리고 있다.
과거 보지 못한 중동 부국들의 현란한 외교 퍼포먼스가 전개되는 가운데 재집권 전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초밀착 관계였던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는 거리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중동을 순방 중인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성과를 평가하는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무리한 관세 전쟁으로 까먹은 점수를 중동 외교에서 회복하는 중이다.
트럼프의 중동 순방 두 번째 여정에서 카타르는 트럼프에게 사전에 최슨 보잉 767-8 항공기를 깜짝 선물해 환심을 샀다. 뒤이어 14일 도하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2000억 달러(약 280조원)에 이르는 보잉 항공기 구매 계약 등 자국 곳간을 활짝 열었다.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구매 외교’에 더해 카타르는 이번에 일본 뺨치는 오모테나시(일본 특유의 손님을 환대하는 대접 문화) 외교술까지 선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도착하자 대형 레드카펫을 깔고 군주(에미르)인 셰이크 타밈 하마드 알 타니가 현장에 직접 나와 트럼프를 환대했다.
도착에 앞서 에어포스원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도하로 이동하는 중에는 카타르 공군 F-15 전투기가 함께 호위하며 ‘하늘길 의전’을 선보였다.
트럼프가 궁으로 이동하는 중에는 대규모 경찰 차량이 투입됐는데 이 중 선두에 강렬한 붉은색의 테슬라 사이버트럭 2대가 배치됐다. 역시나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고도의 계산이다. 도착 길목에는 수 십마리의 낙타와 아라비아 말까지 눈요깃거리로 투입하는 등 역대급 의전쇼를 과시했다.
이번 순방 이벤트를 준비하기에 앞서 카타르는 이스라엘-하마스 간에 휴전과 인질 교환을 성공적으로 중재하며 트럼프 2기 행정부로부터 많은 점수를 딴 상태였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극진한 외교술로 대통령의 마음을 녹이며 확고한 우호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14일 셰이크 타밈 군주와 대화하며 그를 “뛰어난 인물”로 치켜세웠다. 또 그를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일명 MBS) 왕세자와 묶어 “키가 크고 멋진 데다 아주 똑똑하다(tall, handsome guys that happen to be very smart)”라고 칭찬했다.
트럼프의 입에서 “똑똑하다”라는 말을 듣는 건 상대에게 최고의 찬사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진 최고의 자산은 정신적으로 안정됐다는 것과 똑똑하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번 순방의 첫 기착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MBS 왕세자가 트럼프를 홀리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곳간 외교력에 더해 시리아와 미국의 화해를 이끄는 ‘깜짝 이벤트’까지 마련하며 중재 외교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트럼프는 13일 사우디 방문 일정 중 시리아에 대한 경제 제재 해제를 지시한 데 이어 14일 리야드에서 MBS 왕세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알샤라 시리아 임시 대통령을 만났다.
알샤라 임시 대통령은 과거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를 이끌었던 인물로 미국이 그의 목에 1000만 달러(약 140억원)의 현상금을 걸 정도로 체포에 혈안이었다.
MBS 왕세자는 과거 140억원의 현상금이 걸린 이 중동의 위험 인물을 트럼프와 악수시키는 역사적 광경을 연출하며 장외 홈런을 쳤다.
그는 지난 3월 자국에서 미국·러시아 간 관계 정상화를 위한 고위급 회담도 성사시킨 바 있다. 사우디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단 협상에서도 가장 강력한 중재자로 뛰고 있다.
오는 15일 튀르키예에서 성사 여부가 주목됐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정상 회담이 불발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MBS 왕세자의 중재력이 보다 절실해진 상황이다.
올해 다시 갱신해야 하는 이란 핵합의 이슈에서는 아랍의 또 다른 부국인 오만이 현명한 중재자 역할을 펼치고 있다.
이란은 지난 2015년 우라늄 농축과 핵연료 재처리를 제한하는 대신 서방이 부과한 제재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오바마 행정부와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을 체결했다. 그런데 후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2018년 일방적으로 JCPOA를 탈퇴하고 경제 제재를 복원했다.
징검다리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와 달리 먼저 이란에 핵협상 재개를 요청하고 올해로 종료되는 JCPOA를 대체할 새 합의를 만들자는 입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리야드에서 열린 투자 포럼 연설에서 “이란이 핵무기를 갖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면서도 “과거 갈등을 종식하고, 차이가 매우 심오하더라도 새로운 파트너십을 맺을 의향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란을 못 믿을 상대로 치부하고 최대압박을 펼친 1기 때와 확연히 달라진 모습니이다. 향후 오만의 중재 역량에 따라 이란이 최종 미국의 요구에 수긍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추구하는 ‘피스메이커’ 역할론 강화는 물론, 중동 내 긴장을 완화하는 중대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미국과 이란은 지난달 12일부터 이달 11일까지 오만 중재로 총 4차례의 고위급 핵협상을 가졌다.
최근 아랍 부국들의 대미 초밀착 행보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무관치 않다.
전쟁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저항의 축’인 하마스와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을 압도하는 힘을 과시하자 급격히 기울어진 힘의 역학에 놀란 아랍 부국들이 트럼프에 밀착하며 지역 내 힘의 균형을 도모하는 흐름이다.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중동 여정에 이스라엘을 제외한 점, 그리고 최근 친이스라엘 인사이자 전쟁 매파로 분류되는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유엔 대사로 보직 변경하며 사실상 경질한 점 등을 들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아니냐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트러블 메이커’로 비춰지는 경제·통상 정책과 달리 외교·안보 정책에서는 이른바 ‘분쟁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어 온갖 투자 선물과 중재 외교 카드로 달려드는 석유 부국들의 러브콜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백악관도 이번 트럼프의 방문을 ‘역사적인 중동 복귀(historic return to the Middle East)’라고 한껏 홍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