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공소’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연 소식’의 줄임말입니다. 공연과 관련해 여러분이 그동안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혹은 재밌는 소식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편집자 주>
지난 10일 경복궁 집옥재에서 열린 ‘2024 가을 궁중문화축전’ 공연 프로그램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 중 첫째 마당 ‘발레 판타지’의 한 장면. 도깨비 역의 발레리노들이 춤을 추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진흥원) |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지난 10일 늦은 저녁, 북악산에 있던 요정과 도깨비가 경복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전각 집옥재를 찾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조용할 이곳에서 발레 무용수들이 전통음악과 함께 이색적인 춤판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고즈넉하기만 한 고궁이 이날만큼은 꿈에서 볼 법한 환상적인 공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2024 가을 궁중문화축전’ 중 공연 프로그램인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의 한 장면입니다.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은 서양의 궁중무용인 발레와 한국의 궁중음악인 수제천(壽齊天)을 접목한 크로스오버 공연으로 2022년 처음 선보였는데요. 예전에도 전통음악과 만난 발레를 본 적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작품은 국립발레단 ‘허난설헌_수월경화’가 있네요.
지난 10일 경복궁 집옥재에서 열린 ‘2024 가을 궁중문화축전’ 공연 프로그램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 중 첫째 마당 ‘발레 정재’의 한 장면. (사진=국가유산진흥원) |
다만 고궁에서 발레를 보는 것은 흔치 않죠. 어떤 공연일지 궁금한 마음에 이날 현장을 찾았습니다. 공연이 열린 경복궁 집옥재는 경복궁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전각입니다. ‘옥(玉)과 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集)’는 뜻으로 고종이 어진과 도서를 보관하며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공연은 크게 세 개의 ‘마당’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첫째 마당은 ‘발레 정재’입니다. 정재(呈才)는 궁중무용을 뜻합니다. 막이 열리자 무대 위 황금빛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등장했습니다. 고궁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에 객석에선 작은 탄성이 나왔습니다. 느린 박자에 절제된 매력이 있는 궁중음악에 맞춰 펼쳐지는 다채로운 발레 기교가 독특했습니다.
지난 10일 경복궁 집옥재에서 열린 ‘2024 가을 궁중문화축전’ 공연 프로그램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 중 둘째 마당 ‘발레 판타지’의 한 장면. 요정 역의 발레리나들이 춤을 추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진흥원) |
이어진 ‘둘째 마당’은 ‘발레 판타지’였습니다. 객석 가운데 마련된 통로로 작은 날개를 달고 북악산 요정으로 변신한 어린 무용수들이 등장했습니다. 경복궁 집옥재는 어느새 환상 속 모험의 세계였습니다. 소리꾼 정혜빈의 구성진 우리 소리에 맞춰 요정 역할의 무용수들이 앙증맞은 춤으로 관객을 미소 짓게 하였습니다. 이어 도깨비로 분한 발레리노들이 등장했는데요.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창작 국악곡 ‘침향무’에 맞춰 추는 박진감 넘치는 춤은 몽환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발레 비나리’를 주제로 한 ‘셋째 마당’이 이날 공연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사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이유 또한 바로 이 셋째 마당에 있었습니다. ‘용의 읊조림’을 뜻하는 수룡음(水龍吟)에 맞춰 발레리노의 독무(獨舞)가 시작됐는데요. 이날 독무의 주인공은 최근 발레계 주목을 받고 있는 전민철이었습니다.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 공연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지난달 전민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였습니다.
지난 10일 경복궁 집옥재에서 열린 ‘2024 가을 궁중문화축전’ 공연 프로그램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 중 셋째 마당 ‘발레 비나리’의 한 장면. 발레리노 전민철이 ‘수룡음’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진흥원) |
전민철은 얼마 전 막을 내린 유니버설발레단 ‘라 바야데르’에서 주인공 솔로르 역으로 전막 발레 주역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는데요. 이날 공연에서 본 모습은 ‘라 바야데르’와 사뭇 달랐습니다. 수룡음에 맞춰 봉황의 몸짓을 표현한 장면이었는데요. 마치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섬세한 손동작과 미세하게 움직이는 팔과 등 근육에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전민철의 독무가 끝난 뒤에는 신명 나는 사물놀이 장단에 맞춰 무용수들의 흥겨운 군무가 이어졌습니다. 어깨춤이 절로 나는 타악 장단과 함께 펼쳐지는 마네즈(발레에서 무대에서 큰 원을 그리며 춤추는 동작)는 그야말로 진풍경이더군요.
이번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의 조주현 교수가 예술감독을 맡고 한예종 학생들로 꾸려진 ‘K-아츠(K-Arts) 발레단’이 출연했습니다. 조주현 예술감독은 ‘예술감독의 글’에서 “2022년 처음 집옥재 공간을 마주했을 때 이 역사적 공간의 아우라로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발레 형식이 탄생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며 “우리의 고궁예술이 우리 민족과 세계인들에게 영원히 사랑받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지난 10일 경복궁 집옥재에서 열린 ‘2024 가을 궁중문화축전’ 공연 프로그램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 중 셋째 마당 ‘발레 비나리’의 한 장면. (사진=국가유산진흥원) |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고궁과 발레, 전통음악이 조화를 잘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니 의문은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정식 공연장이 아니다 보니 객석 단차가 거의 없었고, 야외무대라 분위기가 다소 산만했다는 점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랄까요.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관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번 공연은 오는 13일까지 이어지고요. 국가유산진흥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궁능 TV’를 통해 지난해 공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