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정원이 품고 있는 온기, 그리고 한 사람을 위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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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설의 화자 혜숙을 좋아한다. 이 사람은 너무 많이 슬퍼 본 적이 있기에 많이 슬프지 않고 조금 슬픈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이고, 그리하여 어느 날엔 누군가의 작은 인사와 함께 자두 두 알이나 쿠키 하나를 받고 웃음을 나누는, 소소하게 기쁜 날들을 보내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 소설을 쓸 때 나는 그런 사람의 작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보다 큰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다. 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꽉 찬 사랑,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면 ‘너무 작은데’라고 할 것만 같은, 그런 사랑과 여전한 그리움 말이다.”
(이주란, ‘김유정문학상 수상 소감’, <2025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 이주란-겨울 정원>, P.9)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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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제19회 김유정문학상에 이주란 소설가의 단편 <겨울 정원>이 선정됐다. 계간 문예지 <문학동네> 2025년 봄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건물 청소 일을 하는 60대 여성 ‘혜숙’의 하루하루의 일상과 황혼 사랑의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김유정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심사평에서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 정원에도 언 배추와 아직 피지 않은 꽃이 심겨 있어 까치와 길고양이들이 바쁘게 오가는 것처럼,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의 삶에도 수많은 슬픔과 웃음, 후회와 그리움이 숨 쉬고 있다”고 해석했다.

이주란 작가. / 사진. © 연합뉴스

이주란 작가. / 사진. © 연합뉴스

작중에서 주인공 혜숙은 제주도로 내려간 친구의 집에 전세로 들어가 작은 정원을 가꾸며 살아간다. 오피스텔 청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소설을 쓰는 딸 ‘미래’와 함께 라면에 소주를 기울이며 저녁을 맞는다. 딸은 짝사랑 고민부터 엄마의 MBTI 추리까지 재잘재잘 잘도 말을 하고, 혜숙은 엄마를 챙겨주는 딸이 귀엽고 고마워서 살뜰히 관심을 보이며 대화한다. 혜숙은 동료 직원들은 물론 오피스텔 입주자들과 사이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오히려 간간이 배려받으며 일터에서 생활한다. 혜숙의 날들은 그렇게 단조롭지만 평화롭게 흘러간다.

잔잔한 일상에 파문이 일어난 것은 ‘큰 글자 도서 읽기 모임’에서 동년배 남자 오인환씨를 만나고부터였다. 그의 지적이고 신사다운 면모에 혜숙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본인 말마따나 ‘육십이 넘은 나이’에 새삼 피어오른 설렘의 새싹이자 그리움의 불씨였다. 혜숙은 기어이 “난 오인환씨가 그립다. 고맙다고 했더니 고마우면 안 되고 사랑해야 된다고 말하던 게, 도통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다던 내게 눈을 감고 해도 좋은 게 진짜 좋은 거라고 말하던 게 그립다”며 사랑에 솔직해진다. 오인환씨의 딸들이 일터까지 찾아와 망신을 주기 전까지는.

“뭐라고 할까. 만나는 동안에도 두세 번쯤은 막연하게, 한 번쯤은 구체적으로 내 미래를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오인환씨의 두 딸이 다녀간 뒤 그 미래가 현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 가지 않으시면 신고해요.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고 돌아서서 난 울었다. 오인환씨는 돌아서면서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난 울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실컷 울자. 그런 생각을 했다. 울음을 그치고도, 미래 친구가 준 튼튼하고 좋은 캠핑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주란, ‘겨울 정원’, <2025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P.41)

이렇게 나이 든 엄마는 메마른 겨울 정원에 ‘못다 핀 꽃 한 송이’ 신세로 남겨지는 마당에, 소설가라지만 아직은 철부지인 딸 미래는 결국 짝사랑 고백에 성공해서 남자와 잘 만나게 됐다고 자랑을 한다. 혜숙은 딸이 기특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면 하염없이 마음이 쓸쓸해진다. 그녀의 일상은 앞으로도 달라질 것 없이 평범한 모습으로 반복될 것이지만, 존재의 외로움은 겨울 정원에 내리는 어스름처럼 깊어만 갈 것이다. 상처는 사랑이 가고 남은 자리에 맺히는 서리꽃이다.

이주란 <겨울 정원> 등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 이미지. © 은행나무 출판사

이주란 <겨울 정원> 등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 이미지. © 은행나무 출판사

김유정 잇는 순수소설의 백미…‘슬픔의 현을 켜고 안식을 연주하다’

토속적 정취와 해학 어린 연애담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순수소설의 서정미를 가장 잘 구현했다고 평가받는 김유정의 단편 ‘봄봄’. 과연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이주란의 ‘겨울 정원’은 그러한 김유정 문학의 맥을 제대로 계승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문단에는 ‘사상과 서사’라는 소설의 본령에서 너무 멀어진, ‘복선과 반전’이라는 롤러코스터형 설정 위주의 작품들이 넘쳐나고 있다. 시대정신과 사회현상을 반영한다는 미명 아래 소재의 특이성, 사건의 갈등 구조에만 치중하는 소설들이 순수와 대중을 가로지르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서사가 서스펜스와 스펙터클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동어반복으로 치달을 때, 최소한 소설만큼은 본질과 다양성 간 균형을 잡았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본말이 전도되다 보니, 문단에서도 이주란의 차분하고 서정적인 소설세계가 되레 독창적인 문학으로 주목받고 있는 현실이다.

사실 이주란 같은 정직한 작가들이 ‘평범한 서사 속의 특별한 철학과 사상’을 드러내며 디테일의 다채로움을 뽐내고 재능경쟁을 벌이는 것이, 우리 문학이 한 차원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소재나 문체, 각종 서사 장치들은 색깔이나 방향성이 기묘하고 무궁하기 때문에 습작생도 조금만 연습하면 일종의 ‘테크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소설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단순 무구한 세계를 미학적으로 해부해 인간 본연의 감정과 사상 그리고 생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길어 올리는’ 작품이다. 화려한 문체나 독특한 소재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것보다, 더 지난하고 고단한 작업이다.

한국 문학은 문학이면서 동시에 철학이다. 근대 문학 특히 그 대표적 존재인 소설은 인간 문화에서 종래의 철학이 지녔던 것과 거의 동등한 위치와 몫을 행하고 있다. 세계란 어떠한 것이며, 인간이란 무엇이며, 선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하고 인간의 삶의 목적을 규정하는 노력이 철학이었다면 오늘날의 문학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와 유형적으로 동일한 몫을 수행하고 있다.
(김윤식․김현, ‘제1장 방법론 비판’, <한국문학사>, P.42~43)

단편 ‘겨울 정원’으로 제19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이주란 작가는 ‘봄봄’으로 대표되는 김유정 순수소설의 서정미를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진 출처. 현대문학 유튜브 캡처

단편 ‘겨울 정원’으로 제19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이주란 작가는 ‘봄봄’으로 대표되는 김유정 순수소설의 서정미를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진 출처. 현대문학 유튜브 캡처

이주란은 지극히 평범한 누군가의 일상을 현미경처럼 세세하게 관찰하고 의식주 활동과 그날그날의 기분 상태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마치 일기나 수필을 읽는 듯, 페이지 몇 장이 넘어가도 우리가 익히 알던 ‘소설적 진전’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결말에 다다를수록 서사는 서서히 세계를 움직이고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그가 놓인 작중 상황도 이전과 다르게 흘러간다. 이주란의 페르소나는 여러 갈래의 인간관계를 겪으며 안식 속의 슬픔을, 슬픔 속의 사랑을 마주한다. 작중 인물들은 평범한 날들 속에 익숙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더 바라는 것이 없다’며 마음을 부여잡지만, 자꾸만 불안을 충동질하는 자신의 잠재의식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주저하며 고민한다. 아직 준비된 것이 없는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해도 될 것인지, 간신히 유지한 평온을 깨뜨리며 더 두근거리는 행복을 찾아 나서도 될 일인지…. 이주란의 갈등은 사건에 있지 않고 각자의 마음에 있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인생의 사건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기에. 슬픔의 현을 켜고 안식을 연주하는 작가, 이주란. 그의 소설을 펼치는 순간, 너무도 평범해서 잊고 살았던 당신의 안식은 조마조마한 사랑으로 뭉근하게 녹아내린다.

그에게 짐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내가 괜찮은지 물었더니 사랑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너한테 집이 될 것 같아.”
“응. 우리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
짐이 될 것 같다고 말하려던 것이 ㅁ을 ㅂ으로 잘못 쳐 그에게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타였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는 말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고 믿고 싶었으나 실제로 며칠이 지나자 역시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주란, ‘이 세상 사람’, <별일은 없고요?>, P.194~195)

당신의 마음을 쓰다듬는 조심스러운 내면 묘사…‘사랑은 디테일에 있다’

이주란의 소설이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석을 섬세하게 제련하고 조심스럽게 윤을 내어 ‘공감’이라는 보석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 보석의 광채는 은은한 위로의 빛으로 물들어, 현실의 허기로 팍팍해진 당신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이주란의 온기는 반전의 쾌감처럼 단박에 따뜻한 감정을 선사하지 않는다. 연인이 서로를 오래 지켜보고 자주 만나며 대화를 맞춰보듯, 화자와 독자의 마음이 서로 열리어 맞닿아질 때까지 함부로 서사를 풀어내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일상을 따라가다 사랑의 감정을 마주치고서는 한동안 고뇌의 길목에서 멈춰 선다.

우울한 유년기(‘H에게’)와 황혼 연애의 좌절(‘겨울 정원’), 언니가 떠나고 홀로 남은 외조카에 대한 연민(‘한 사람을 위한 마음’) 등 주인공을 둘러싼 작중의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흔들리기 시작한 감정은 숨길 수가 없다. 그래서 때론 약속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일은 없고요?’라고 금세 문자로 안부를 묻는 남자의 관심에, ‘한참을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다 불현듯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느끼기도 한다. 서로 피해 입히지 않고 조용하게 각자도생하는 것이 속 편한 인생이라지만, 그렇게 차갑게 다잡았던 마음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순수한 관심이요, 사랑이라는 요망한 감정이 아니던가. 이주란의 소설에서 진정한 사랑은 불꽃 같은 정열도 드라마틱한 프러포즈도 아닌, 감정을 머금고 속삭이는 그 치밀한 농도 조절의 ‘디테일’에 깃들어 있다.

나는 송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거나 내 품에 안겨 잘 때 슬프면서도 행복하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슬프고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행복하다. 그러니까 내가 송이를 바라볼 땐 언제나 슬픔이 먼저고 그다음이 행복인데 송이도 그랬으면 하는 것. 송이가 자신을 바라볼 때 처음엔 좀 슬프더라도 마지막은 좋았으면 하는 것…… 그게 내 유일한 바람이다.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한 사람을 위한 마음>, P.20)

자전적 요소일지 모르겠으나, 이주란의 소설에는 모녀지간(母女之間)이 흔히 중심적 관계로 등장한다. 다 큰 딸과 나이 든 엄마가 한집에 사는데 집밥을 해 먹고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 딸과 엄마가 서로를 신경 쓰며 보살피고 의지하는 내용이 소설의 기본 배경이자 핵심 서사로 작용한다. 일부 작품에서 아버지는 폭력적 기억으로 잠시 회상되나 대부분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문학세계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자아 독립과 안정 희구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모녀가 반복된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즐기며 더 바랄 것도,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자신을 단속하는 건 평온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태도다. 누군가의 평온에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처절하게 분투해 온 아픈 과거들이 있는 법이다. 남들에게는 시시한 평온일지언정, 모녀에게는 사소하다고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생활의 전부인 것이다.

그렇게 간신히 쌓아 올린 평온한 일상의 세계를 흔들리게 하는 것은 생계의 절박함이나 일터에서의 난관이 아닌, 갑자기 찾아온 사랑의 개입이다. 때로는 도피하는 심정으로 일부러 외면하고 살아왔던 ‘사랑의 노크’로 인해, 고요히 다듬어왔던 마음은 요동치고 그로 인해 일상 역시 동요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과의 성패를 떠나 설렘으로 하루하루를 애틋하게 만들고, 그리움으로 삶의 이유를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충격’이라 할 수 있다.

이주란 작가의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좋아 보여서 다행>, <별일은 없고요?>. 우리네 단순한 일상 속 삶의 의미를 일깨워 준 사랑의 가치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 이미지 출처. yes24

이주란 작가의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좋아 보여서 다행>, <별일은 없고요?>. 우리네 단순한 일상 속 삶의 의미를 일깨워 준 사랑의 가치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 이미지 출처. yes24

“글 쓰면서 사는 일, 이해받기 어려워”…생업전선에서 피워낸 ‘문학의 꽃’

소설가 이주란은 1984년 김포에서 태어나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다녔다. 2012년 계간 <세계의 문학> 신인상에 단편 ‘선물’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주란은 당선 소감에서 어머니와 언니, 동생,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인생의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소설을 썼고, 소설은 그런 저를 지켜줬다”고 말했다. 유년기 등 성장 배경이 잘 알려지지 않은 그는 문단 활동을 활발히 하기보다는 생업과 집필에 조용히 집중해 온 작가였다. 등단 이후에도 학원 운영 등 직업인으로 바쁘게 생활하면서 틈날 때마다 작품을 썼다.

데뷔 초기 한동안은 자신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사실도 잘 인지하지 못한 채,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일과 글의 사이에서 번민의 날들을 보냈다고 한다. 이주란은 2022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거의 회사원처럼 출근했다가 돌아와서 쉬고 집안일하고, 일주일에 며칠 쉬는 날이 있어서 그때 글을 쓴다”며 “(글을 쓸 때마다) ‘내가 글쓰기의 이 많은 과정들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걸 잘할 수 있는 사람일까’하는 고민을 한다. 글 쓰면서 사는 일은 이해받기가 좀 어려운 것 같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생업 전선에서 묵묵히 버텨 온 이주란의 소설은 자신의 현실처럼 평범한 일상을 묘사했지만 갈고 닦은 내공만큼은 결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조용한 실력파’의 작품들은 물밑에서 서서히 입소문이 나면서 평단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로 2018년 김준성문학상, 단편 <넌 쉽게 말했지만>으로 2019년 젊은작가상, 장편 <수면 아래>로 2023년 한국가톨릭문학상 신인상을 거머쥐며 ‘주목받는 작가’로 올라선다. 동료 작가인 소설가 박상영과 시인 오은의 추천을 받기도 한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별일은 없고요?>는 독자들이 애정하는 ‘이주란 문학’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주란의 소설에서 진정한 사랑은 불꽃 같은 정열도 드라마틱한 프러포즈도 아닌, 감정을 머금고 속삭이는 그 치밀한 농도 조절의 ‘디테일’에 깃들어 있다. / 이미지. © 은행나무 출판사

이주란의 소설에서 진정한 사랑은 불꽃 같은 정열도 드라마틱한 프러포즈도 아닌, 감정을 머금고 속삭이는 그 치밀한 농도 조절의 ‘디테일’에 깃들어 있다. / 이미지. © 은행나무 출판사
“어떤 일이 하나 있으면, 슬프기만 하거나 사랑하기만 하거나 둘 중 하나만이 아니고 많은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오래 만났으니까 더 슬프기도 하지만, 그래서 여전히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세상 모두를 돕고 사랑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곁에 있는 한 사람은 사랑할 수 있어요. 내 주변의 단 한 명에게 최선을 다하고 살면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마다 슬픔을 가진 조용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어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요.”
(‘기획특집: 제26회 가톨릭문학상 신인상 수상자 이주란 작가’ 인터뷰 기사, 2023년 4월 9일 자 <가톨릭신문> 제3338호)

평범한 것이 가장 소중한 법…우리가 잊고 산 ‘삶의 가치’는 무엇이었나

언니들이 감탄했다. 우리들은 피자와 함께 막걸리와 복분자주를 마셨다. 은자 언니는 방에 아들이 사다 준 흰 백합이 그려진 액자를 걸고 싶은데 자기 집이 아니라서 마음대로 못을 박지 못해 속상하다고 말했다. 난 미래에게 들어본 적이 있는 정보를 언니에게 줬다.
언니, 착한 못이라는 게 있어. 벽 안 뚫고도 걸 수 있는 거야.
그래?
응. 내가 주문해줄게 안 비싸.
난 미래에게 그걸 좀 주문해주길 부탁하고 미래는 곧바로 OK를 했다.
언니, 주문했대.
고마워. 이제 그거 올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겠다.
(이주란, ‘겨울 정원’, <2025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P.35)

<겨울 정원>에서 혜숙의 처지는 겉으로 보기에 ‘남편 없이 홀로 사는 60대 여성 청소 노동자’지만 그의 하루하루는 어지간한 청년보다도 바쁘고 활기차다. 일찍 퇴근해서 일할 준비를 하고 자신만의 여유 시간을 보내며 꼬박꼬박 식사도 잘한다. 저녁이면 딸과 술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때로는 동료 언니들과 홈파티도 즐기며 정답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를 귀찮게 하는 오피스텔 내의 사소한 관리 문제도 투덕거리며 해치우다 보면 별일 아닌 것이다. 그 나이까지 험한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신변 비관’이 아니라, 이 나이에도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은근히 묻어난다.

오인환씨와 황혼 사랑이 이뤄지지 못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별에 이르러 일순 서러운 감정이 들 수도 있겠으나, 작중에서 묘사된 상황도 처절한 슬픔과 고독의 엄습과는 거리가 있다. 어쩐지 서글프지만, 자신을 잃어버리는 지경에 다다르지는 않는다. 사랑에 성공한 딸과 실패한 자신의 대조된 상황이 슬프게 느껴지면서도, 마음을 완전히 닫고 있지는 않은 혜숙. 시간이 지나가면 옛사랑의 페이지는 접히고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터이니…. 달리 생각해보면 한때나마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곤 했던 소중한 추억이 아니던가. 이주란의 관조적 문체는 그 복잡미묘한 감정의 여운 속에서 빛을 발한다.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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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 외로움과 괴로움이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인간들 사이의 운명이란 회자정리(會者定離)요, 시절인연(時節因緣)인 것이다. 영원한 것이 없으니 구태여 미련을 둘 여유도 없다. 비극도 흘러가면 기억의 단면이 되고, 행복도 오래되면 윤색된 추억으로 남을 따름이다.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일상의 지속과 회복 탄력성이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 곁에, 평범한 날들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동료 언니들과 나눠 먹는 피자와 막걸리 한 잔의 소박한 만찬, 아들이 선물한 액자를 못 걸어 동동거리는 언니에게 ‘벽에 구멍 안 내는 못’을 주문시켜주는 순수한 배려, 이루지 못했기에 더 달콤하게 남아 있는 황혼 사랑의 꿈까지. 오늘 흘린 눈물을 닦아내면 내일 그대의 눈을 다시 바라볼 수 있으니, 이제 울음을 그치고 걸어보자…. 일상의 단순함에서 인생의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작가 이주란, 그의 겨울 정원에서는 누구나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신승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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