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만찬 참석해보니
검은 드레스로 참석한 한강
“문학은 체온가져” 영어 소감
청중 1300명 박수갈채 터져
노벨만찬 4시간 넘게 진행
좌석 배치도만 64쪽 달해
만찬 후 무도회로 막내려
10일(현지시간) 청중 1300명의 시선이 몰린 ‘노벨 만찬(Nobel Banquet)’. 한강 작가는 8세 때 폭우가 쏟아져 처마 밑에 웅크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산수 학원을 다녀오는 길, 비가 내리자 건너편에도 처마 밑에 선 사람들이 보였다. 그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면서 “그걸 바라보며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수많은 1인칭을 경험한 것”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한강 작가는 “읽고 쓰는 데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면, 경이로운 순간을 거듭했다. 언어의 실을 따라 다른 마음의 깊은 곳, 또 다른 내면과의 만남을 이뤘다”면서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언어, 이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어떤 체온을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깊은 울림을 주는 그의 수상 소감에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 만찬장이 울릴 만큼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한강 작가가 ‘노벨 메달’을 받고 2시간 후 열린 노벨 만찬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행사다. 로비는 통하지 않는다. 한국 기자는 25명이 시상식에 초청됐지만, 만찬 참석까지 승인받은 기자는 8명(방송사 3곳·신문사 4곳·통신사 1곳)이었다. 그러나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식대가 ‘공짜’도 아니다. 승인 후 한 끼 식사비 3600크로나(약 48만원)를 선입금해야 ‘겨우’ 참석할 수 있다.
그래도 이날 만찬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시각, 청각, 후각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종합 예술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만찬장 로비에 들어서니 참석자 전체 명단과 좌석 배치도가 인쇄된 64쪽짜리 소책자가 제공됐다. 1300명이 동시에 식사하기에 본인 자리를 찾기가 ‘미로’에 가까운데, 혼란을 방지하고자 노벨재단이 아예 책자로 안내한 것이었다.
총길이 25m, 84명이 앉는 테이블A(헤드테이블)가 식장을 세로로 가로지른다. 다른 인원은 그 옆의 60여 개 테이블에 앉게 된다.
테이블A엔 한강 작가(좌석 번호 A-72)를 포함해 올해 노벨상 수상자,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 부부와 왕가 후손들, 그리고 노벨재단 주최 측이 앉는다. 과거 노벨상 수상자도 만찬 참석 시 ‘특급 대우’를 받는데, 이날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A-9)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노벨상 124년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란 공통점과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로지르는 문학’이란 분모를 공유한 둘은 반갑게 인사했다. 만찬의 핵심 인물인 칼 구스타프 16세 국왕은 정중앙 좌석인 A-22에 앉아 한강 작가와는 다섯 자리 떨어져 있었다.
알프레드 노벨을 추모하는 국왕의 건배사로 성대한 개막을 알리는 노벨 만찬은 4~5시간이나 걸린다. 요리는 총 3코스로 애피타이저(1요리)는 비트와 호박이 들어간 염소치즈 요리, 메인디시(2요리)는 트러플을 섞은 닭고기 퀘넬, 디저트(3요리)는 캐러멜화한 사과로 만든 테린이었다. 퀘넬은 음식을 숟가락 모양으로 만든 요리를, 테린은 차갑게 굳힌 패티를 뜻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메인디시가 서빙되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는데 ‘폼 드 뷔(Pomme de Vie)’란 이름의 사과 브랜디가 들어간 소스가 그야말로 ‘천국의 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다들 접시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노벨 디저트’로 불리는 역사적인 요리 역시 감탄을 자아냈다. 달게 절인 사과를 1㎜ 두께, 1㎝ 부채꼴 모양으로 썰어 겹친 모양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귀한 예술품 같아 포크를 대기 망설여질 지경이었다.
그릇 하나, 포크 하나, 나이프 하나에도 모두 뒷면에 ‘NOBEL(노벨)’이 새겨져 있었다. 노벨재단 근무 18년 차인 레베카 옥센스트롬 언론담당 헤드는 “와인잔 하나가 900크로나(약 12만원)”라며 “매년 이곳에 오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고, 참석자들도 만족도가 높아 뿌듯하다”고 설명했다.
노벨 만찬이 단지 한 번의 사치스러운 식사만은 아니다. 요리와 요리가 서빙되는 사이마다 공연이 한 차례씩 펼쳐져서다. 이날은 총 4번의 공연이 열렸다. ‘노벨 디저트’가 나오기 직전 셰프 40명이 불꽃이 타오르는 거대한 접시를 왼손에 받치고 2층 계단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장면도 장관이었다.
서빙 직원들은 모두 스웨덴 대학생들이며, 노벨 만찬 ‘아르바이트’는 그 자체로 권위가 높아 경쟁률이 높다고 전해진다. 식사가 끝나자 다들 계단을 올라 2층에서 열릴 ‘노벨 무도회’로 향하면서 한 사람당 1개씩 제공된 ‘노벨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실제 노벨 메달과 똑같은 6.6㎜ 크기로 만들어진 초콜릿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