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명령의 핵심: 이민 신분이 금융 리스크가 되는 시대
미국 텍사스에서 물류법인을 운영하는 K사의 김 대표는 최근 거래 은행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서류 제출 요청을 받았다. 법인 실소유주의 체류 자격 증빙, 임원 전원의 비자 상태 확인서, 그리고 한국 모회사와의 지배구조 소명 자료였다. 평소라면 없던 요구였다. 이 변화의 배경이 바로 지난 5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미국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 회복(Restoring the Integrity of the American Financial System)’ 행정명령이다.
이 행정명령은 1970년 제정된 은행비밀법(Bank Secrecy Act)을 근거로 금융기관의 고객확인의무(KYC)를 대폭 강화한다.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고객의 이민 신분과 체류 자격을 금융 리스크 평가의 공식 요소로 편입시킨다. 쉽게 말해, 영주권자가 아닌 비자 체류자라는 사실 자체가 은행 시스템에서 ‘주의’ 표시가 붙는 것이다. 둘째, 사회보장번호(SSN) 대신 개인납세자번호(ITIN)를 사용한 계좌 개설 및 금융 거래를 고위험 활동으로 분류한다. ITIN은 합법적 세금 신고를 위해 발급되는 번호임에도, 이제는 그 자체가 금융기관의 경계 대상이 된 셈이다. 셋째, 실소유주를 은닉하기 위한 유령회사(shell company) 설립, 반복적 현금 인출, 장부 외 임금 지급 등을 의심 거래 징후로 명시한다.
한국 기업과 주재원에 대한 실질적 영향
이번 행정명령은 서류미비 이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합법적 비자로 체류하는 한국 기업 주재원, 현지 법인 임직원, 투자자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자. 한국 대기업 A사가 델라웨어주에 설립한 미국 자회사의 법인 계좌가 있다. 실소유주(beneficial owner)는 한국 본사의 임원이고, 현지 법인장은 L-1 비자로 체류 중이다. 새 규정 하에서 은행은 이 법인의 지배구조를 ‘외국인이 실질 지배하는 고위험 구조’로 분류할 수 있으며, 추가 소명 자료를 요구하거나 최악의 경우 계좌 동결(디뱅킹)을 단행할 수 있다.
더 일상적인 상황도 문제가 된다. E-2 투자비자로 LA에서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박 사장의 경우, 비자 갱신 시점이 다가오면 은행이 자동으로 리스크 등급을 상향 조정할 수 있다. 비자가 만료되기 3개월 전부터 신용카드 한도가 축소되거나, 대출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행정명령은 금융기관에 ‘확대경’을 하나 더 쥐어준 것과 같다. 기존에는 자금세탁 여부만 들여다보던 은행이, 이제는 ‘누가 이 돈의 주인인가’를 넘어 ‘이 사람이 여기 있을 자격이 있는가’까지 살피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이 즉시 점검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내 법인 및 계열사의 실소유주 신고(BOI Report)가 최신 상태인지 확인해야 한다. 2024년부터 시행된 기업투명성법(Corporate Transparency Act)상의 신고 의무와 이번 행정명령이 결합되면, 신고 누락이 계좌 폐쇄의 직접적 사유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필자가 자문하는 한 중견기업은 미국 자회사 설립 후 BOI 신고를 누락한 채 2년간 운영하다가, 최근 거래 은행의 컴플라이언스 심사에서 적발되어 30일 내 소명하지 않으면 계좌를 폐쇄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둘째, 주재원 및 현지 채용 직원의 비자 상태와 취업 허가 유효성을 금융기관 제출 서류 관점에서 재정비해야 한다. 인사팀의 비자 관리 파일과 재무팀의 은행 제출 서류가 따로 놀고 있다면, 지금이 이를 통합할 적기다. 셋째, ITIN으로 운영 중인 거래 계좌가 있다면 SSN 기반 전환 가능 여부를 즉시 검토해야 한다.
향후 전망과 대응 방향
당초 트럼프 행정부는 모든 신규·기존 고객에게 시민권 정보 제출을 의무화하려 했으나 금융권의 반발로 후퇴한 만큼, 이번 행정명령은 ‘1단계’에 불과할 수 있다. 마치 2001년 애국자법(Patriot Act) 이후 금융기관의 테러자금 차단 의무가 해마다 강화되었듯이, 이민 신분 기반의 금융 규제도 점진적으로 촘촘해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 기업에 대한 조언은 명확하다. 첫째, 미국 현지 금융 컴플라이언스 전문 법률 자문을 통해 계좌 구조를 선제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문제가 터진 후 변호사를 찾는 것은, 화재 후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같다. 둘째, 체류 자격 관련 서류를 상시 갱신 가능한 체계로 구축하라. 비자 만료 90일 전 자동 알림 시스템을 금융 서류 관리와 연동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규제 환경의 변화를 단순한 이민 정책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기업 재무 운영의 연속성(business continuity)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시점이다. 미국 금융 시스템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한 서류 가방은 한층 두꺼워져야 한다.
본 칼럼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구체적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당 분야 전문 변호사의 자문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김봉준 법무법인 김&배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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