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끔찍했던 기억 마주해야 트라우마 치료 가능”

9 hours ago 2

[위클리 리포트] ‘트라우마 치유 주간’ 맞아 치료 전문가 훈련현장을 가다
국립정신건강센터 치료자 워크숍
정신과 의사-사회복지사 등 한자리… 日 트라우마 치료 권위자가 강연
“환자가 도움받는다고 느끼게 해… 스스로 감정 드러내도록 독려를”
치료 난도에 비해 수가-보수 낮아… 전문 인력들 현장 떠나기 일쑤
‘회복 인프라’ 위해 사회적 지원을

16일 서울 광진구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일본 트라우마 치료의 권위자인 김 요시하루 일본 국립정신·신경의료연구센터 명예 센터장이 국내 트라우마 치료자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6일 서울 광진구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일본 트라우마 치료의 권위자인 김 요시하루 일본 국립정신·신경의료연구센터 명예 센터장이 국내 트라우마 치료자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제가 탄 차가 갑자기 휩쓸렸어요. ‘쿵’ 소리가 나더니 무릎이 아팠고 몸이 눌리는 것 같더니…. 그다음은 기억이 안 나요.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어요.”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잇던 여성. 맞은편에 앉은 다른 여성이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생각이 드나요?”

“어…. 뭐지? 이게 뭐지?”

“냄새는 없나요?”

“잘 모르겠어요.”

“쿵 소리가 났을 때로 다시 돌아가 볼게요.” 16일 서울 광진구 국립정신건강센터. 교통사고 생존자의 상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트라우마 치료자의 실습 장면이었다.

지난달 영남권을 휩쓴 대규모 산불과 지난해 말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등 사건·사고가 이어지면서 한국 사회 곳곳에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이 많아졌다. 트라우마 치료자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 이들 곁에서 함께 견디며 회복을 돕는다. 언젠가 닥쳐올지 모르는 누군가의 그날을 대비한 트라우마 치료자의 훈련 현장을 다녀왔다.

● 가장 끔찍한 기억 피하지 않아야 치료

국립정신건강센터는 트라우마 치유 주간을 맞아 이달 14∼16일 치료 워크숍을 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와 정신건강전문요원(간호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작업치료사) 등 트라우마 치료자 4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워크숍 주제는 트라우마를 겪고 PTSD 진단을 받은 환자를 치료하는 기법의 하나인 ‘지속 노출 치료(Prolonged Exposure Therapy)’였다. 트라우마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마주하면서 점차 불안을 줄여 나가는 치료 방법이다. 국제적으로 가장 효과가 높은 것으로 검증된 PTSD 치료법 3가지 중 하나다.

예컨대 검은 모자를 썼던 사람에게 성폭행당한 피해자가 사건 이후 검은색 물건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모자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공포를 느낀다면 지속 노출 치료를 통해서 ‘검은색과 모자는 안전하다’는 것을 천천히 학습하는 것이다.

치료는 눈을 감고 당시 상황을 상상하거나 관련된 장소에 직접 가보는 방식이다. 이날 실습은 환자 트라우마 경험 중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뜻하는 ‘핫스폿(Hot spot)’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환자가 사건 당시 풍경, 냄새, 감각 등을 여러 번 반복적으로 묘사해 당시 상황을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었다.

● “강요 말고 환자 스스로 감정 드러내게 해야”

워크숍은 일본 트라우마 치료 권위자로 꼽히는 김 요시하루(金吉晴) 일본 국립정신·신경의료연구센터 명예 센터장이 직접 자신의 치료 경험을 이야기하며 진행됐다. 김 명예 센터장은 “환자는 트라우마를 겪고 회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처를 보기 싫다고 덮어두면 감염이 생기듯 오히려 상처를 드러내야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걸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단계별 치료법을 설명하며 치료자들이 하기 쉬운 실수에 대해 조언했다.

“환자에게 ‘기억을 떠올리라’고 강요하면 환자는 더 움츠러듭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비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라는 이야기 다들 아시죠? ‘내가 계속 여기서 당신을 돕고 있다’는 느낌을 반복해서 주면 환자는 스스로 안에 있는 감정을 잘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워크숍에 참여한 주은하 정신건강간호사는 “평소 트라우마 환자를 만나 상담할 때 기폭제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할 때면 조심스럽고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며 “괜히 그 기억에 대해서 에둘러 말하곤 했는데 가장 힘든 기억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니 앞으로 상담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고난도 치료, 수가 낮아 시도 어려워

트라우마 치료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지속 노출 치료처럼 고난도 치료는 높은 전문성을 갖춘 훈련된 전문가만이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치료자는 오히려 환자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백명재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 발생 초기에 준비되지 않은 전문가가 현장에 투입돼 피해자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경기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트라우마 치료를 하겠다며 현장을 찾은 이가 아직 정서적으로 충분히 안정되지 않은 학생들에게 갑작스럽게 ‘바다를 그리라’고 해서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든 일도 있었다. 당시 경험을 계기로 트라우마 치료자들이 뼈아픈 반성을 했고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를 만드는 등 전문성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현실적인 제약이 크다. 일단 고난도 치료에 대한 수가(건강보험으로 지급하는 진료비)가 너무 낮아 실제로 현장에서 시행하기 쉽지 않다. 백 교수는 “지속 노출 치료와 인지 처리 치료 등은 치료에 걸리는 시간도 회당 60∼90분으로 길고 난도도 매우 높은데 일반 상담보다도 수가가 낮다”며 “이런 구조에선 적극적으로 치료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지역센터 이직률 높아 환자 치료에 어려움

지역 사회 트라우마 대응 최전선에 있는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현실도 녹록지 않다. 센터는 지역 사회에서 재난이나 대규모 사고가 발생했을 때 바로 현장으로 투입돼 피해자를 지원한다. 하지만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지역 사회 트라우마 대응 현실을 두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심 센터장은 “센터에 있는 정신건강 전문 인력은 대부분 트라우마 환자를 대하는 기본 교육을 받고 있지만, 이직률이 너무 높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업무 강도와 난도에 비해 보수가 너무 낮아 평균 근속연수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갑작스럽게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들을 지원하려면 고도의 전문성과 꾸준한 신뢰 관계 형성이 필수다. 하지만 지금은 한자리에 오래 머물면서 환자와 함께할 사람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열악한 센터 환경은 수년 전부터 지역 사회 정신건강 인프라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혀 왔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 회복의 산, 혼자 오르지 않도록 해야

워크숍에 참여한 정유선 정신건강사회복지사는 “트라우마 치료자는 등산 안내자 같다. 회복이라는 산을 오르는 건 환자고 속도와 보폭도 환자가 정한다”며 “치료자는 다만 안전한 경로를 제시하면서 환자와 함께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트라우마 회복은 쉽지 않다. 그 길을 미리 배워 환자 곁에 서주는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안내자가 충분히 훈련되지 않았거나 금세 자리를 떠난다면 회복을 위한 여정은 더 고단해질 수밖에 없다.

“훌륭한 트라우마 치료자가 곧 우리 사회 전체의 회복 인프라입니다. 우리 사회가 트라우마 치료 역량을 키우려면 반짝하는 일회성이 아니라, 그들이 치료 현장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구조와 지속적인 사회적 투자가 필요합니다.”(심 센터장)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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