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정책과 ‘난방의 전기화’ 흐름을 타고 히트펌프 시장에서 가전업계와 보일러업계의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정부가 대규모 보조금을 앞세워 시장 진입 장벽이었던 가격 부담을 낮추면서다. 보일러 업체들은 난방·온수 통합 시스템 역량을, 가전업체들은 열압축 기술력을 앞세워 시장 선점에 나섰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경동나비엔은 지난 28일 제주시 오라이동에서 ‘나비엔 난방 전기화 센터’ 개소식을 열고 운영에 들어갔다. 이 센터는 공기열 보일러(히트펌프) 전시와 고객 상담, 설치 서비스, 운영 관리 등을 맡는다. 경동나비엔 관계자는 “제주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높지만 난방·온수는 여전히 화석연료 의존도가 크다”며 “난방 전기화 사업의 전초기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경동나비엔은 이곳에서 데이터를 분석해 전국 확대 전략을 마련할 계획이다.
"2035년까지 히트펌프 350만대 보급"
히트펌프는 공기나 물, 땅 속의 열을 끌어와 실내 난방과 온수를 공급하는 기술이다. 화석연료를 직접 태우지 않아 차세대 친환경 난방 기술로 꼽힌다. 에너지 효율도 높다. 일반 가스보일러가 100의 에너지로 80~90 수준의 열을 생산한다면, 히트펌프는 같은 에너지로 400~500 수준의 열효과를 낸다.
우수한 성능에도 보급이 더뎠던 원인은 높은 가격이다. 히트펌프는 실외기·축열탱크·수배관 공사 등 설치 비용만 1000만~1200만원 수준에 달했다.
정부가 파격적인 보조금을 투입하면서 시장 분위기가 반전됐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해 12월 발표한 ‘히트펌프 보급 활성화 방안’을 통해 2035년까지 히트펌프를 누적 350만대 보급하고 온실가스 518만t을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올해는 국비 144억5000만원을 투입해 제주와 경남 지역 태양광 설치 단독주택을 대상으로 설치비의 최대 70%를 지원하기로 했다. 소비자 부담이 1000만원대에서 300만~400만원 수준으로 낮아지게 된 것이다.
삼성 LG, 해외 '히트펌프 연구소' 운영
시장 빗장이 열리면서 기존에는 접점이 없었던 에어컨업계와 보일러업계 간 경쟁 구도가 뚜렷해지고 있다. 에어컨이 실내 열을 외부로 배출하는 장치라면, 히트펌프는 외부 열을 실내로 끌어오는 구조여서 핵심 원리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냉매와 컴프레서(냉매 압축 부품) 기술력을 보유한 가전업체들이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선 배경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기존 보일러 배관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EHS 히트펌프 보일러’를 출시했다. LG전자도 지난 5월 실외기와 본체를 일체화한 ‘일체형 히트펌프 보일러’를 선보였다. 양사는 유럽 등 해외 각지에서 히트펌프 연구개발(R&D) 조직도 운영 중이다.
전통 보일러업계는 한국 고유의 온돌 난방과 온수를 정밀하게 다뤄온 수배관 기술력을 무기로 방어선을 쳤다. 업계 관계자는 “히트펌프는 TV나 냉장고처럼 콘센트만 꽂으면 되는 제품이 아니라, 건물 전체의 난방·온수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귀뚜라미는 스마트팜과 체육시설을 중심으로 히트펌프를 확장하고 있다. 경동나비엔은 난방과 온수를 통합 관리하는 자체 배관 시스템 ‘히티허브’를 앞세우고 있다. 김용범 경동나비엔 영업마케팅 총괄임원(부사장)은 “2035년까지 국내 히트펌프 시장 점유율 30%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조금 의존은 한계 있어...기술개발 뒷받침 돼야
단 정부 보조금에만 의존해선 히트펌프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히트펌프 보급이 가장 활발한 유럽에서도 정부 지원이 축소되자 시장 성장세가 급격히 둔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유럽히트펌프협회(EHPA)에 따르면 유럽 주요 14개국의 2024년 히트펌프 판매량은 220만대로 전년(280만대) 대비 21% 줄었다. 히트펌프 재고량은 2800만대로, 누적 설치 대수(2600만대)를 넘어섰다. 화석연료 기반 난방에서 히트펌프로의 전환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했다는 평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유럽 각국 정부는 대규모 보조금을 앞세워 히트펌프 시장을 육성했다. 판매량은 2014년 80만대에서 2022년 300만대로 늘었다.
하지만 재정 부담이 커지면서 지원 정책을 축소하거나 지급 요건을 강화하자 시장도 빠르게 식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는 히트펌프 단독 교체가 아닌, 에너지 효율 개선 효과가 큰 전면 리모델링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기준을 강화한 결과 2024년 히트펌프 판매량이 전년 대비 40% 급감했다. 이탈리아는 설치 비용의 110%를 세액공제해주던 ‘슈퍼보너스’ 제도를 축소하면서 판매량이 3~5% 감소했다. 오스트리아 역시 보조금 지급이 지연되면서 소비자 부담이 커지자 시장 성장세가 둔화했다.
한국 정부도 올해 히트펌프 설치비의 최대 70%를 지원하며 시장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보조금 지원이 축소되면 언제든 시장이 급격히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속적인 보급 확대를 위해서는 보조금보다 기술 개발을 통한 제품 가격 인하와 효율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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