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한국과 미국 간 ‘2+2 통상 협의’에서 환율 문제가 공식 의제로 채택되면서 트럼프 2기 행정부 초기부터 가능성이 제기됐던 원화 절상(원·달러 환율 하락) 압박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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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들을 대상으로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등 통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사진= AFP) |
美대선 이후 원화가치 급락…원·달러 환율 급등
28일 국제결제은행(BIS)과 한국은행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지난해 11월 93이었던 한국의 실질실효환율(REER·Real effective exchange rate)은 지난달 89.3으로 약 4% 급락하며 주요국 중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실질실효환율은 자국의 통화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얼마나 강한지, 경쟁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무역 비중을 고려해 여러 나라의 통화가 서로 교환되는 비율과 물가 차이를 반영한다. 흔히 우리가 보는 원·달러 환율을 명목 환율이라고 하는데, 한국과 미국의 물가 수준까지 고려한 것이 실질실효환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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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한국은행) |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원·달러 환율도 큰 폭으로 오른 상태다. 최근 달러 약세에도 원·달러 환율은 1440원대를 넘나들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나라는 미국 정부의 관찰 대상에 올라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들에 대해 수출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국 통화 가치를 떨어뜨린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지속된 환율 상승기에 원화 가치를 방어(달러 매도)하는 방향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우리 외환 당국은 지난해 외환시장 안정화 조치를 위해 111억 7400만달러를 순매도했다. 우리 정부도 원치 않는 원화가치 하락에 따른 시장 개입으로 외환 보유액 감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까지 높은 상황에서 환율 문제가 한미 간 협상 테이블에 오른 것에 대해 시장과 학계 모두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더구나 미국 정부도 이같은 사정을 알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환율 조작국이 아닌 환율 관찰대상국으로만 지정한 상태다. 미 재무부는 환율조작국을 지정할 때 △지난 1년간 150억달러 이상의 대미 무역흑자 △국내총생산(GDP)의 3%를 초과하는 경상수지 흑자 △8개월 이상 GDP의 2% 이상의 외환을 지속적으로 순매수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한다. 우리나라는 달러 순매수를 통한 외환시장 개입 요건은 충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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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은 매 분기 말 기준으로 3개월 후에 시장안정조치 내역을 공개한다. (자료= 한국은행) |
“환율, 협상 ‘지렛대’로 활용”…“선언적 문구로 압박할수도”
미국 정부가 통상 협상 의제로 환율을 올린 것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은 과거에도 정부 간 협상에서 환율 조작 문제를 비관세장벽의 하나로 규정하면서 지렛대로 활용하는 전략을 취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위원은 “미국측에서도 환율을 임의로 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나 우리 정부가 원화 절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며 “환율 협상은 관세 등 다른 부분에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될 공산이 크다. 초장기 국채 매입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봤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과거 플라자합의 때와는 외환시장 규모 자체가 30~40배가 커졌기 때문에 당국이 개입한다고 해도 원하는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방위비 문제도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겠다고 했는데 환율도 나중에 따로 엮어서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직접적인 시장 개입은 무리더라도 선언적인 문구 등을 통한 원화 절상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환당국 전문가는 “한미 간 통상 조건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겠다는 식으로 원화 절상 노력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며 “현재는 환율이 오를 것만 같지만 달러 약세와 시장 개입에 대한 경계감이 맞물리면서 환율이 하락하기 시작하면 의외로 하단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곧 나올 미 재무부 환율보고서를 통해 환율 조작국 지정 가능성을 비치면서 압박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미국측이 우리나라의 분기별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가 3개월 이후 이뤄지는 것에 대해 투명성이 떨어진다며 문제제기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편, 기재부 관계자는 “상대국이 있는 사안이다 보니 현재로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실무협의를 통해 구체화하기로 했고, 협의 일정도 모두 대외비”라며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