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최근 벌이는 힘겨루기의 중심에는 반도체가 있습니다. 미국은 2022년 10월 중국에 대한 광범위한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를 처음 도입한 뒤 최근까지 강도를 꾸준히 높였습니다. 중국은 이에 맞서 '반도체 굴기(崛起·우뚝 일어섬)'를 추진 중이지만 여전히 중국과 주요 선진국 기업 간의 기술 격차 큽니다. 중국 기업이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는 현재 7㎚(나노미터)짜리가 최첨단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삼성전자, 대만의 TSMC는 올해 내로 2㎚ 반도체 양산을 시작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 기업 라피더스가 올 6월까지 미국 브로드컴에 2㎚ 반도체 시제품을 공급한다는 뉴스도 나왔습니다.
반도체의 성능을 얘기할 때 자주 나오는 '㎚(나노미터)'는 본래 길이의 단위로, 1㎚는 '10억분의 1m'를 뜻합니다. 과거에는 이 말이 반도체의 실제 물리적 특징(반도체 트랜지스터의 전류 흐름을 제어하는 부품인 '게이트'의 길이)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적으로 더 진보된 반도체를 구분하기 위한 상징적인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통신 기술을 지칭하는 2G, 5G 같은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통신 기술은 G 앞에 붙은 숫자가 클수록 첨단이지만, 반도체의 ㎚는 거꾸로 숫자가 작은 게 더 첨단입니다.
이처럼 고전하는 중국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 최근 현지 주식시장에서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가가 급등하는 중국 반도체 기업이 적지 않다는 건데요. 중국 반도체 산업에 제재를 가하는 미국 보란 듯이 주가가 오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죠. 상하이종합지수와 선전종합지수는 지난달 12일 단기 고점을 찍고 이달 17일까지 각각 6.35%, 9.31% 떨어졌습니다. 최근 중국 주식시장은 현지 정부의 부양책에 대한 실망과 '트럼프 트레이드' 우려가 겹쳐 조정받고 있거든요. 그런데 중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 가기다비이스(603986)는 같은 기간 59.46% 올랐습니다.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기업 SMIC(00981)는 이 기간 45.57% 상승했고, 인쇄회로기판(PCB) 기업 선난써키트(002916) 역시 25.91% 급등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PCB 기업 팡정테크(600601)는 같은 기간 23.89% 올랐습니다. 다른 반도체 관련 기업 성훙테크(300476), 둥산정밀(002384), 강소장전테크(600584) 등도 이 기간 각각 11.73%, 4.85%, 4.69% 상승했습니다. 커촹반(외국인의 투자가 금지되는 상하이증권거래소 하이테크 기업 전용 증시) 종목인 관계로 우리나라 투자자가 매수할 수는 없지만, 시가총액이 약 50조원에 달하는 팹리스 기업 캠브리콘(688256)은 2.60% 올랐습니다. 상승 폭이 크진 않아도 같은 기간 상하이종합지수(-6.35%)와 선전종합지수(-9.31%)에 비해서는 흐름이 양호합니다.
이들 반도체 기업의 주가가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요. 주요 외신들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비록 속도는 느릴지라도 꾸준히 성과를 내는 덕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닛케이아시아는 지난달 '중국의 기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화웨이의 사명' 보도에서 "미국이 제재를 가속화했던 지난 5년 동안 중국은 관련 기술 공급망을 국내에서 구축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그 결과 중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국내 솔루션을 개발할 수 있었고, 중국 기업들은 지정학적 위험을 피하기 위해 국내 업체와의 협력을 택했다"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많은 반도체 밸류체인 기업이 글로벌 선두권 플레이어로 부상했다"고 했습니다. 중국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의 58.5%, TV 시장의 40% 이상, 컴퓨터 시의 30% 이상을 점유하고 있어 중국 내 DRAM 수요만도 적지 않습니다.
관련 기업의 실적이 이런 시각 뒷받침합니다. 금융정보업체 LSEG가 집계한 컨센서스(증권사 추정치 평균)에 따르면 기가디바이스의 매출은 2023년 57억6100만위안에서 2024년 74억7300만위안으로 29.2% 상승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2025년에는 94억3300만위안으로 26.7% 추가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SMIC의 매출은 2023년 494억8800만위안에서 2024년 620억4800만위안으로 25.4% 개선된 뒤 2025년에는 708억8100만위안으로 14.2% 더 높아질 것으로 증권가는 예상합니다.
다른 중국 반도체 기업의 실적도 최근 상승세가 두드러집니다. 선난써키트의 매출은 2023년부터 2024년까지 30.1% 상승한 뒤 2025년에는 15.4% 추가 개선이 가능할 전망입니다. 이밖에 팡정테크(44.4%·28.8%), 성훙테크(43.3%·35.9%), 둥산정밀(12.0%·15.2%), 강소장전테크(18.4%·15.9%) 등 다른 반도체 기업도 2023년부터 2024년까지, 그리고 2024년부터 2025년까지 연간 매출 상승률이 각각 두 자릿수를 기록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대만, 미국 등 첨단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중국이 배제됐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반도체 기업의 해외 협력의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건 아닙니다. 비록 발전의 정도에서는 뒤처졌을지라도 그 외의 지역에 중국과 협력할 의사가 있는 기업은 있습니다. 스위스 반도체 기업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지난해 11월 커촹반의 파운드리 기업 화훙반도체(688347)와 협약을 맺은 게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 협약에서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화훙반도체는 오는 연말까지 중국에서 40㎚짜리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을 생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MCU는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 등을 합친 통합 반도체로서 자동차, 산업 장치 등을 제어하는 역할을 합니다. MCU는 현재 22㎚짜리가 최첨단이며, 40㎚짜리는 비용 대비 성능 측면에서 인기를 끄는 옵션 중 하나입니다.
스마트폰 등 전자제품을 만드는 중국의 비상장 기업 화웨이, 그리고 비상장 파운드리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XMT)가 이런 움직임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게 주요 외신의 설명입니다. 화웨이는 다수의 중국 반도체 밸류체인 기업에 인력을 파견해 이들의 역량을 키우며 반도체 굴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화웨이가 반도체 생산 기업은 아니지만, 과거 TSMC나 삼성전자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의 고객이었기 때문에 관련 전문성이 높아 이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하네요. CXMT는 중국의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5년 전 0%에서 최근 5%로 끌어 올린 장본인입니다.
닛케이아시아는 지난 15일 '중국, 삼성과 마이크론에 도전하며 DRAM 칩 시장 진출' 보도에서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엘리 왕 연구원을 인용해 "용량, 생산 품질 및 실제 시장 영향을 고려할 때 모든 중국 기업의 시장 점유율은 작년 5%에서 올해 10%로 급증할 수 있다"며 "현재 중국 DRAM 제조업체의 고객은 여전히 국내에 집중돼 있고, 해외 진출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7월 '미국은 화웨이를 무너뜨리고 싶어 했으나 이 기업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보도에서 한 미국 공무원을 인용해 "워싱턴은 화웨이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며 "중국에 군사적 우위를 안겨줄 수 있는 인공지능(AI) 반도체를 화웨이가 만들지는 않는지 감시 중"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정책 저널 '아메리칸 어페어스(American Affairs)'는 지난해 11월 게재한 '미국의 수출 통제에 대응한 중국 반도체 산업의 진화' 논문에서 "화웨이는 미국이 수출 통제와 투자 제한 대상으로 지정한 반도체 기술 분야에서 연구 성과를 올리고 있다"며 "2025년에 이런 흐름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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