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파운드리(수탁생산) 업체 글로벌파운드리스가 미국 내 공장 증설과 기술 개발을 위해 160억달러(약 21조75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특히 이번 투자는 애플, 퀄컴, 제너럴모터스(GM) 등의 지원을 받아 추진된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산업 부활을 위해 자국 내 생산을 독려하는 가운데 미국 기업들이 ‘반도체 연합군’을 꾸려 시장 확대에 나선 것이다.
◇ ‘공격 모드’로 돌변한 美 파운드리
글로벌파운드리스는 4일(현지시간) 뉴욕주 몰타와 버몬트주 에식스정션 등에 있는 기존 미국 공장을 확장하는 데 130억달러를 투입하고, 고급 패키징 및 반도체 기술 연구개발(R&D)에 3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팀 브린 글로벌파운드리스 최고경영자(CEO)는 “수요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자금을 집행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집행 시기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이번 투자는 인공지능(AI)의 폭발적 성장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라며 “현재 가장 큰 수요 공백이 존재하는 곳이 미국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공급망의 안전성이 중요하다”며 “최근 6개월간 미국 내 공장에서 생산 확대 요청이 급증했다”고 덧붙였다. 글로벌파운드리스는 미국, 독일, 싱가포르에 생산 거점을 두고 있다.
글로벌파운드리스는 그동안 수요가 확실할 때만 생산 능력을 키우는 보수적 전략을 고수해왔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이 회사의 신규 공장 및 설비 투자 규모는 연평균 14억달러로, 삼성전자와 인텔의 수십억달러대 투자와 비교하면 훨씬 적다. 이번 160억달러 투자는 기존 연간 투자액의 10배가 넘는다.
업계에선 이 같은 공격적 행보가 트럼프 행정부의 제조업 부활 정책과 맞닿아 있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 등 전략산업을 경제안보의 핵심으로 꼽으며 미국 내 생산을 강조해왔다. 고율 관세와 등 보호무역 기조에 따라 미국 내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글로벌파운드리스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시장 점유율 확대에 나선 것이다.
지난달에는 글로벌파운드리스가 대만 파운드리 업체 UMC와 합병을 검토 중이란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당시 여러 관계자 말을 인용해 “중국과 대만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 내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양사 합병이 논의되고 있다”고 전했다.
◇ 애플, 퀄컴, GM도 지원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 TSMC가 독주 체제를 굳히고 있다. TSMC의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4분기 67%로 전 분기 61%보다 상승하며 경쟁사와 격차를 더 벌렸다. 삼성전자와 글로벌파운드리스의 시장 점유율은 각각 11%, 5%에 그쳤다. AI 칩 등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서는 90% 이상을 TSMC가 장악하고 있다. 글로벌파운드리스는 최첨단 TSMC와의 최첨단 반도체 생산 경쟁을 사실상 포기하고 전력 제어, 데이터 처리 관련 반도체를 중심으로 틈새 시장을 공략해왔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파운드리스의 미국 공장 증설이 삼성전자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기술력에선 글로벌파운드리스가 삼성전자의 상대가 안 되지만 미국 빅테크들이 자국 기업인 글로벌파운드리스에 일감을 몰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TSMC와의 경쟁에 밀려 가뜩이나 미국 내 파운드리 주문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글로벌파운드리스와의 수주 경쟁이 더 심해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 삭감도 악재 요인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이날 상원 세출위원회에 출석해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도입된 반도체 보조금에 대해 “일부 보조금은 과도하게 관대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에 관해 재협상했고 대부분의 합의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아직 합의되지 않은 계약은 애초에 체결되지 말았어야 할 것들뿐”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370억달러를 투입해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인데 미국 정부에서 보조금 47억4500만달러를 받기로 했다. SK하이닉스도 인디애나주에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짓는 조건으로 최대 4억5800만달러 보조금을 받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보조금을 주지 않아도 관세로 압박하면 기업들이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며 보조금 삭감을 주장해왔다.
임다연 기자 allo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