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력반도체 업계 재편이 본격화했다. 도요타그룹 계열 세계 2위 부품사 덴소가 롬에 인수를 제안했고, 롬은 도시바, 미쓰비시전기와 사업 통합 협상에 착수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4개 업체가 다양한 의도로 움직이는 만큼 재편 결과는 불투명하다”고 17일 짚었다.
○롬, 3사 통합 “앞장서겠다”
지난 3월 롬과 도시바, 미쓰비시전기 등 3사의 통합 협의 착수 기자회견. 아즈마 가쓰미 롬 사장은 “전력반도체 세계 10위에 진입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2024년 매출 기준 롬의 세계 전력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2.5%로 12위에 그쳤다. 미쓰비시전기가 4.6%로 4위, 도시바는 2.6%로 10위였다. 3사가 통합하면 9.7%로 독일 인피니언(17.4%)에 이어 세계 2위에 오른다. 지금은 인피니언, 미국 온세미(8.5%), 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6.9%)가 3강을 형성하고 있다.
롬은 전기차 부문 부진으로 2024회계연도에 500억엔 적자를 기록하며, 12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2025회계연도에는 차량용 및 인공지능(AI) 서버용 수요 회복으로 100억엔 흑자로 돌아설 전망이다. 다만 안정적으로 돈을 버는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롬은 지난 2월 덴소에서 인수 제의를 받았다. 도요타그룹 산하에 들어가면 차량용 사업이 안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금력을 바탕으로 투자 선택지도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차량용 사업 의존도가 높아져 롬이 성장을 기대하는 AI 서버용 등 사업 전개에 제약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아즈마 사장은 3사 연합에 대해 “매우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수 있어 시황 변동에도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덴소의 인수 제안에 대해 롬은 사외이사 등으로 구성한 특별위원회가 “별도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아즈마 사장은 업계 재편에 대해 “롬이 선두에 설 수 있는 분야는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다만 3사 통합은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해지는 만큼 “사공이 너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덴소, 생존 위해 롬 인수 추진
“반도체 없이는 자동차 부품 업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덴소가 롬에 인수를 제안한 배경에는 이런 위기감이 있다. 자동차가 전동화·지능화로 ‘달리는 스마트폰’이 되면서, 반도체는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야시 신노스케 덴소 사장은 지난달 중기 경영계획 발표에서 “반도체가 자동차의 가치를 끌어올린다”고 말했다.
자동차 산업은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에 더해, 자율주행을 비롯한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개발로 경쟁이 확대되고 있다. 덴소는 인버터,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등 전동화를 뒷받침하는 부품을 다룬다. 센서 등에 사용되는 아날로그 반도체 개발부터 생산까지 담당한다. 자율주행에 쓰이는 첨단 로직반도체 설계 회사도 설립했다.
미래차에서 가장 주목받는 반도체 중 하나가 모터 제어에 사용되는 전력반도체다. 롬은 에너지 효율이 높은 실리콘카바이드(SiC) 기반 차량용 전력반도체 분야 강자다. 하야시 사장은 자동차와 반도체를 어떻게 결합해 나갈지가 “일본 반도체 새로운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라며 롬과는 “시너지가 크다”고 했다.
덴소는 지난해 전동화·지능화 분야 매출이 2조8000억엔으로,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할 전망이다. 이 회사는 이 분야 매출을 2030년 4조엔으로 늘릴 계획이다. 부품 대기업으로서 경쟁력을 지키려면 반도체를 자체 개발·조달하고 업그레이드하는 체제가 필요하다.
○일본 1위 미쓰비시전기의 자신감
우루마 케이 미쓰비시전기 사장은 중국 기업의 저렴한 고품질 반도체 판매 확대에 위기감을 느껴왔다. 롬 및 도시바와 통합 협의에 참여해 생산 비용 절감과 개발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우루마 사장은 그동안 일본 전력반도체 업체에 사업 통합을 촉구해 왔다. 중국 경쟁사가 점차 실력을 키워 상위권을 잠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에 지지 않는 저비용 칩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호소해 왔다.
업계 재편의 장점은 원료 조달 등에서 비용 절감뿐만이 아니다. 개발을 일원화하면 정부 보조금으로 투자를 지속하는 중국 기업에 뒤지지 않는 고성능 제품을 저비용으로 개발할 수 있다.
차량용 사업 비중은 롬이 50%로 가장 높다. 도시바가 40%, 미쓰비시전기는 12%에 그친다. 전기차 시장 침체로 롬과 도시바는 곤경에 빠졌지만, 미쓰비시전기의 타격은 크지 않다. 실제 지난해 미쓰비시전기의 반도체·디바이스 사업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 증가한 2900억엔, 영업이익은 3% 늘어난 420억엔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실적을 기록 중인 미쓰비시전기는 롬, 도시바와 상황이 다른 만큼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지 못하면 재편에 거리를 둘 가능성도 있다. 니혼게이자이는 “실적이 호조인 미쓰비시전기는 강경한 자세로 협상에 임할 것”이라며 “중국의 부상이라는 위협을 전사적으로 공유하지 못하면 통합 협의는 정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도시바, 재상장 위한 효율 개선
도시바의 목표는 재상장이다. 전력반도체 분야 세계 1위인 독일 인피니언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3사 연합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도시바는 가전과 전기차 등 저·중전압 분야에, 미쓰비시전기는 철도와 송배전망 등 고전압 분야에 강점이 있다. 롬은 차세대 제품의 일관 생산이 특기다. 통합이 실현되면 인피니언처럼 여러 종류의 반도체를 세트로 판매할 수 있다. 원재료 일괄 조달을 통한 비용 절감도 기대된다.
도시바는 2023년 상장을 폐지한 뒤 전력반도체 분야에서 외부 제휴를 모색해 왔다. 도시바를 인수한 투자펀드 일본산업파트너스(JIP) 제안으로 롬이 3000억엔을 출자해 도시바와 롬의 연합은 수순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양사 협업은 진전되지 않았다. 기업 문화 차이도 컸고, 전기차 수요 감소가 협업을 정체시켰다.
교착 상태는 덴소의 롬 인수 제안으로 급변했다. 롬은 덴소에 답해야 했고, 만일 거부하면 주주가치를 높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했다. 도시바와 대주주인 롬의 관계도 변하고 있다. 도시바는 롬의 3000억엔 출자 중 우선주 1650억엔을 상환했다. 한편 롬이 전기차 부진에 허덕이며 3사 통합을 위한 환경이 갖춰졌다. 3사 통합은 JIP가 목표로 하는 도시바의 재상장을 위해 경영 효율을 한층 높이는 한 수가 될 것이라고 니혼게이자이는 분석했다.
도쿄=김일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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