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기업 경영진의 경영 판단과 관련한 손해배상 책임에 상한을 두는 회사법 개정을 추진한다. 회사 대표와 이사의 부담을 줄여 인수합병(M&A)과 설비투자에 더 공격적으로 나서게 하려는 의도다. 중대재해처벌법에 개정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까지 시행되며 경영진 처벌이 강화되고 있는 한국과 상반된다.
10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르면 내년부터 이사의 손해배상 책임액에 상한을 설정하기로 하고 관련 법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거액의 배상 판결이 날 수 있다는 부담에 기업 경영진이 대규모 투자나 M&A를 미루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일본 법무성 산하 법제심의회는 올해 법안 개요를 마련해 내년 정기의회에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미리 손해배상액 상한을 정하는 ‘책임 제한 계약’ 제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 회사법은 사외이사만 선의·무중과실 조건 아래 손해배상 책임을 일정 범위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를 대표이사와 일반 사내이사까지 확대 적용한다.
일본 정부는 법 개정의 배경으로 “인공지능(AI)과 반도체, 탈탄소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 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경영진이 법적 처벌을 두려워하면 기업가정신이 위축돼 과감한 투자를 꺼릴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 리스크를 줄이면 우수한 해외 전문경영인 영입도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기업과 경영진의 책임을 강화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M&A 및 구조조정 관련 결정에 빈번하게 배임죄가 적용되는 가운데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산업재해에 따른 형사처벌 부담까지 경영진에 지웠다.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하청업체 노동자와 관련한 민·형사 책임까지 경영자가 져야 할 상황이다.
日, AI·반도체 공격 경영 유도하는데…韓은 '기업가 족쇄' 더 늘어
"투자 실패 두려워말라" 日, 경영진 손해배상 상한 둬
경영진의 법적 부담을 낮추는 일본 회사법 개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업가 정신 살리기’다. 일본 정부는 법 개정을 추진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혁신이 이뤄지는 미국의 사업 환경을 집중 조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에서는 고의적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르거나 이해상충에 해당하지 않는 일상적인 경영 판단에는 책임을 묻지 않는 문화가 강하다. 미국 델라웨어주는 이사의 경영 활동에 대한 책임 제한을 허용하며, 네바다주는 고의나 사기가 아닌 경우 원칙적으로 이사 책임을 면제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AI 투자 위한 부담 낮추기
일본 정부는 이번 법 개정을 단순한 법률 정비를 넘어 기업 지배구조와 투자 환경 개선 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최근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이 추진 중인 규제 완화, 스타트업 육성, 해외 자금 유치 정책 등 친기업 정책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특히 인공지능(AI), 반도체, 탈탄소 분야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에서 지나친 법적 리스크가 일본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내년에 관련 법이 개정되면 일본 기업의 대표와 주요 임원은 ‘책임 제한 계약’을 회사와 맺을 수 있다. 중과실이 없고 선의로 행해진 것으로 인정받는 경영 판단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일정 범위 한도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책임 상한은 현행 회사법상 ‘최저 책임 한도’를 기준으로 할 가능성이 크다. 현행법은 대표의 경우 연간 보수의 6배, 대표가 아닌 업무집행이사는 연봉의 4배까지 책임을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구체적인 상한은 기업과 협의해 결정할 계획이다.
이번 논의의 배경에는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를 둘러싼 초고액 배상 판결이 있다. 도쿄지방법원은 2022년 주주대표소송에서 도쿄전력홀딩스의 옛 경영진 4명에게 총 13조3210억엔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판결은 일본 사법 역사상 이례적 규모의 손해배상 명령으로 평가됐다. 해당 판결은 지난해 도쿄고등법원에서 뒤집혔지만 경영 행위 관련 법적 리스크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일본 재계는 정부에 “사후적으로 경영 판단 책임이 무한대로 확대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투자 위축 요인”이라는 우려를 제기했다.
2022년 판결 이후 일본에서는 기업 임원 배상 책임보험 가입이 크게 늘었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보험 가입이 기업 비용을 늘리고, 경영자 부담은 줄여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법 개정 실무 작업을 하고 있는 법무성 산하 법제심의회는 “보험 보장 한도에는 제한이 있고 대규모 소송이 발생하면 결국 경영진 개인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상반된 길 가는 한국
반면 한국에서는 기업 경영진의 법적 책임 부담이 날로 커지고 있다. 경영권 승계, 계열사 합병, 자산 매각 과정과 관련해서는 배임 혐의가 빈번히 적용됐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산업 재해와 관련해 대표를 형사 처벌하는 근거도 마련됐다. 개정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까지 시행되면서 사용자 범위가 확대되고, 그만큼 기업 경영진이 져야 할 법적 책임의 범위도 넓어졌다. “법적 리스크가 커진 만큼 경영 의사결정도 지연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한국 내 외국 기업 사이에서까지 나온다.
특히 한국은 경영 판단이 검찰 수사와 형사 재판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많아 경영진의 부담이 크다. 해당 문제가 민사 소송으로 끝나는 미국이나 일본과 상반된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이 기업 경영 리스크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서로 다른 균형점을 선택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일본은 장기 침체 이후 투자와 기업가 정신 회복에 정책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한국은 노동·안전·지배구조 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과 미국 등 주요 국가는 기업가 정신과 리스크 감수를 성장 전략의 핵심으로 보고 경영진 보호 장치를 강화하고 있다”며 “한국은 형사처벌과 책임 확대 중심 기조가 강해 투자와 신사업 추진에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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