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주요 7개국(G7) 이탈리아에 대한 이미지는 Fashion(패션), Food(음식), Furniture(가구), Ferrari(페라리) 등 '4F'에 국한돼 있다. 이탈리아가 유럽 최고의 제조 강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핵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헬리콥터 발명가 코라디노 다스카니오, 세계 최초 상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인텔 4004'를 발명한 페데리코 파진 등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이탈리아 출신이다. 물리와 화학 등 노벨과학상도 20명을 배출했다.
테슬라 전기차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9000t급 초대형 기가프레스도 이탈리아의 주조장비업체 '이드라'가 유일하게 만든다. 이탈리아는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우주 분야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지난 21일 서울 용산 이탈리아 대사관저에서 열린 '이탈리아스페이스데이' 행사를 위해 방한한 마우리치오 켈리 이탈리아 우주비행사를 만났다.
이탈리아, 지난 5년간 70억 유로 우주에 투자
켈리 비행사는 "이탈리아는 1964년 12월 미국과 옛 소련에 이어 세 번째로 인공위성 '산 마르코'를 쏘아올렸다"며 "이탈리의 우주 경쟁력 제고를 위해 2021년 '이탈리아 우주의 날'을 제정했고, 이를 알리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1959년 5월 모데나에서 태어난 켈리 비행사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8명의 우주비행사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는 국가 우주 영웅이다.
그는 1978년 이탈리아 포추올리 항공아카데미에 입학해 항공 과학을 전공했고, 1983년 세계 최초의 마하 2급 전투기이자 '스타파이터'라는 별명을 가진 2세대 전투기 'F-104'의 정찰 조종사로 배치됐다. 1988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비행학교인 영국 '엠파이어 테스트 파일럿 스쿨'을 수석 졸업했다. 1996년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 왕복 프로그램인 '컬럼비아 STS-75' 미션에 참여해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다녀왔다.
이외에도 유럽형 전투기 '유로파이터 타이푼'의 운영 개발도 총괄했다. 켈리 비행사는 "2005년 경비행기 설계 스타트업 'CFM Air'를 창업했고, 이듬해 스포츠 경비행기 기내 전자기기 개발 전문 회사 'DigiSky'를 설립했다"며 "이탈리아 우주청(ASI)과 이탈리아 우주항공연구센터(CIRA) 이사회 멤버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탈리아가 우주 강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고 질문하자 켈리 비행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탈리아가 우주항공 부문에 투자를 시작한 건 1920년대"라며 "100년 이상 장기간 꾸준한 투자와 정책 지원을 통해 지금의 우주 생태계를 형성했다"고 밝혔다. 이탈리아는 유럽우주국(ESA) 설립 멤버 중 하나로 22개 국가, 15개 국제기관과 100개 이상의 협력을 하고 있다. 켈리 비행사는 "1988년 설립된 ASI는 우주 연구를 비롯해 재해 예방을 위한 지구 관측, 기후 변화 측정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며 "ASI는 로마 본청 외 마테라, 사르데냐 섬, 케냐 말린디 등 세 곳의 운영 기지가 있다"고 말했다.
뉴스페이스 시대를 맞아 이탈리아도 우주 산업에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ASI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우주 분야에 2022년부터 5년간 70억 유로의 예산을 쏟아부었다. 켈리 비행사는 "이탈리아에는 레오나르도, 탈레스 알레니아라는 엄청난 우주 대기업들이 있다"면서도 "이탈리아 우주 생태계의 핵심은 중소기업"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2023년 기준 250여개의 중소 기업이 19억 유로의 매출을 내며 이탈리아 우주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과 이탈리아 '스페이스 동맹' 기대
한국과 이탈리아는 뉴스페이스 시대를 맞아 민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과 이탈리아는 2023년 11월 세르지오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우주협력 MOU를 맺었다. 그는 "MOU에는 우주 연구 및 탐사, 환경 모니터링 및 재난 관리에 중점을 둔 지구 관측, 합성 조리개 레이더 등 다양한 협업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한국은 응용 과학 경쟁력과 이탈리아의 기초 과학이 만나면 우주 분야에서의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은 우주항공청 주도 산업대표단이 이탈리아를 방문을 준비 중이다. ASI 대표단도 2026년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민간에선 탈레스 알레니아가 한국 군의 중대형 정찰위성 사업인 '425' 사업과 한국형 위성항법시스템(KPS)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켈리 비행사는 "더 많은 이탈리아 우주 기업들이 한국과의 협력 확대를 기대 중"이라고 전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소감을 묻자 "슬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켈리 비행사는 "우주에는 지구의 파란색, 지구 대기의 하얀색, 우주의 검은색 뿐"이라며 "세 가지 색이 주는 황홀함이 굉장했지만 인류를 지켜주는 대기권이 환경 파괴로 점점 얇아지는 게 눈으로 보여 슬펐다"고 회상했다. 인류가 달에 다시 가야 하는 이유도 설명했다. 화성을 포함해 더 먼 우주로 가기 위한 중간 거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켈리 비행사는 "달 기지 구축을 위해 우주에서 오래 생존할 방법과 자동 수리 시스템, 인공지능(AI) 활용 등이 필요하다"며 "우주비행사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며 제언했다.
그러면서 켈리 비행사는 한국인 우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켈리 비행사는 "우주 산업 부흥을 위해선 우주비행사 육성이 필수"라며 "빠른 시일 내에 한국 우주인을 만나길 고대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은 2006년 정부의 한국 우주인 배출사업에 따라 고산씨와 이소연씨를 선발했지만 이후 한국 우주인 육성 사업은 답보 상태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