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격’에 대비해 기업 구원투수로 나서야 할 산업은행 앞에 장애물이 떨어졌다. 산은이 보유한 HMM 전환사채(CB)가 주식 7200만 주로 전환되면서 건전성 지표에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본지 2024년 11월 21일자 A1, 5면 참조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하락하면서 기업대출 등 자금 공급 여력이 최대 5조원 이상 급감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산은, HMM 주식 7200만 주 획득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은과 해양진흥공사는 17일 7200억원 규모의 HMM 영구 CB에 대한 주식 전환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전환 대상은 HMM이 2020년 4월 발행한 CB다. 당시 산은과 해진공은 이를 절반(3600억원)씩 인수했다.
산은과 해진공은 이번 전환권 행사로 각각 HMM 주식 7200만 주를 추가로 획득한다. 해당 CB의 전환가액은 5000원으로, HMM 현 주가(16일 종가 기준 1만9440원)의 4분의 1 수준이다. 산은이 가진 HMM 지분율은 기존 33.73%에서 36.02%로, 해진공은 33.32%에서 35.67%로 높아진다. 양대 주주의 지분을 합하면 72%에 달한다.
HMM은 산은과 해진공을 상대로 발행한 영구채를 모두 털어내게 됐다. HMM은 2016~2020년 해운업 위기 당시 유동성 확보를 위해 산은과 해진공을 상대로 총 3조5800억원 규모의 CB를 발행했다.
산은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HMM 지분이 늘어날수록 건전성 지표인 BIS 자기자본비율 관리가 어려워져서다. 주식 등 위험가중자산이 많을수록 자기자본비율은 낮아진다. 지난해 말 기준 산은의 BIS 자기자본비율은 13.90%다. 국내 20개 은행 중 최하위다. 금융당국 권고치인 13%를 간신히 넘긴 수준이다.
HMM 주가가 오를수록 BIS 자기자본비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BIS 규정상 은행이 자기자본 대비 특정 기업 지분을 15% 이상 보유하면 15%가 넘는 지분에는 위험가중치 1250%를 매긴다. 산은의 지난해 말 기준 총자본은 45조9316억원이다. 주식 전환권 행사 이후 산은이 보유한 HMM 지분 총액은 7조1772억원(이날 종가 기준)으로 늘어난다. 산은 총자본 대비 HMM 지분 보유 비율은 15.6%, 이미 ‘15% 룰’을 넘어섰다. HMM 주가가 1만8660원 이상을 유지하면 15% 룰이 적용된다.
이번 주식 전환권 행사로 산은 BIS 자기자본비율이 0.1~0.2%포인트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BIS 비율이 떨어지면 조달금리가 높아져 산은의 자금 공급 여력이 쪼그라든다. 통상 BIS 비율이 0.01%포인트 하락할 때마다 대출 여력이 약 2500억원 감소하는 것으로 본다. 산은의 자금 공급 여력이 최대 5조원가량 줄어들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법정 자본 한도(30조원) 소진율이 90%에 육박해 대규모 증자에 나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다.
◇정책금융 공급 차질 우려
산은의 건전성 악화에 따라 자금 공급 여력이 줄어들면서 반도체·배터리 등 국내 기업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은은 반도체, 2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전략사업 투자를 비롯해 다양한 정책금융 수요에 대응 중이다. 최근 정부는 미국 통상 정책에 대처하기 위해 산은이 운영하는 반도체 저리 대출 프로그램 규모를 기존 17조원에서 20조원으로 늘리기도 했다.
건전성 지표 급락을 막기 위해 HMM이 산은 보유 지분 일부를 매입하는 방식이 논의된다. HMM은 연내 2조원 규모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할 계획이다. 이르면 다음달부터 HMM의 자사주 매입 절차가 시작될 예정이다.
산은과 해진공에 정통한 관계자는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산은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HMM 지분 때문에 발목을 잡혔다”며 “지분을 정리하지 않는 이상 소규모 증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강조했다.
신연수/서형교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