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수단은 8월 열린 프랑스 파리 올림픽에서 금 13개, 은 9개, 동메달 10개를 획득해 종합 8위를 했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48년 만에 가장 적은 선수 144명이 참가했지만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런데 여기에 동메달 하나를 더해야 한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역도 남자 최중량급(105kg 이상급)에 출전했던 전상균(43)이 파리 올림픽 기간 중 12년 만에 빼앗겼던 올림픽 메달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전상균은 프랑스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에 마련된 챔피언스 파크에서 열린 ‘메달 재배정 행사’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현재 전상균은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의 ‘차장님’이다. 런던 올림픽 이후 선수에서 은퇴한 그는 소속팀이던 한국조폐공사 역도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2014년 말 역도팀이 해체되면서 일반 회사원으로 ‘환직’했다. 경북 경산에 위치한 화폐본부에서 지폐와 동전 등을 수요처에 공급하는 게 주 업무다.
그는 “눈앞에서 엄청난 돈뭉치를 보고 다룬다. 사소한 사고라도 나면 안 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철저하게 준비한다.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다”며 “처음엔 회사 생활이 낯설고 쉽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 많이 배우면서 잘 지내 왔다”고 했다.
10년 가까이 바벨과 떨어져 있던 그에게 올해 초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루슬한 알베고프(러시아)가 도핑 위반 혐의로 메달을 박탈당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동메달은 4위를 한 전상균이 승계하게 됐다. 전상균은 런던 올림픽에서 인상 190kg, 용상 246kg으로 합계 436kg을 들어 4위에 올랐다.전상균은 “올해 초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연락이 왔다. 동메달을 재배정받게 됐는데 ‘파리에 와서 받을래? 아니면 택배로 보내줄까’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파리 한 번 가 보자고 해서 파리에 가게 됐다”며 웃었다. 그는 역도 선수 출신인 아내 오윤진(개명전 오숙경) 씨와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선수 시절 이후 오랜만에 찾은 파리에서 그는 잊고 있었던 역도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IOC는 그에게 비행기 표와 체류비를 지원했다. 하지만 경기장 출입이 가능한 AD카드는 배정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돈을 주고 역도 경기장 입장 티켓을 구했다. 그리고 박혜정(21)이 여자 최중량급(81kg 초과급)에서 은메달을 들어 올리는 걸 관중석에서 지켜봤다. 전상균은 “(박)혜정이가 은메달을 따고, 시상대에 서는 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며 “언젠가는 다시 역도 지도자가 돼 내가 키운 선수가 올림픽 시상대에 서는 모습을 머리속으로 그려봤다”고 했다.
올림픽 메달이 없었기 때문인지 전상균은 그동안 실력에 비해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 역도에 모처럼 나온 최중량급의 최강자였다.2000년대 중후반 한국 여자 역도 최중량급에 장미란(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이 있었다면 남자 역도 최중량급에는 전상균이 있었다. 장미란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는 드는 여자 선수였다면, 전상균은 모든 한국 사람을 통틀어 가장 힘이 센 남자였다.
다만 올림픽 메달만은 번번이 그를 외면했다. 대표적인 대회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다. 대회를 전후해 근육통을 앓았던 그는 근육 이완제를 처방받아 복용했다. 문제는 이완제를 과도하게 먹는 바람에 막상 힘을 써야 할 때 근육이 다 풀려버린 것이다.
장비 덕도 보지 못했다. 평소 그는 일본 제품이나 스웨덴제 바벨을 썼는데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산만 쓰도록 규정했다. 그는 “보기와 달리 내가 손이 좀 예민한 편이다. 이상하리만치 중국 제품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인상에서 세 차례 모두 실패하며 허무하게 실격을 당하고 말았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도 비슷했다. 평소 갖고 있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인상 때 그는 평소보다 10kg 정도 무게가 덜 나왔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올림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 용상 종목까지 무사히 마쳤다. 돌이켜보면 포기하지 않았기에 4위를 했고, 4위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동메달까지 되찾을 수 있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된 후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다. IOC로부터 통보를 받은 4월부터 그는 매달 52만5000원의 올림픽 동메달 연금을 받고 있다. 동료, 지인들로부터 축하도 많이 받았다. 그는 “무엇보다 내가 노력해서 딴 올림픽 메달을 평생 간직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기쁨”이라고 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부담도 있다. 예전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자칫 사고를 쳤다가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명예를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에 비해 훨씬 절제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술자리를 할 수밖에 없는데 최대한 조심해서 먹으려 한다”며 했다.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룬 그에겐 ‘부녀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역사(力士)의 피를 물려받은 딸 전희수(17)가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어서다.
여고생인 전희수는 9월 스페인에서 열린 2024 세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 여자 76kg급에서 인상 102kg, 용상 130kg, 합계 232kg을 들어 세 부문 모두 은메달을 따냈다. 10월 전국체전에서는 용상 131㎏을 들어 여고부 한국 신기록도 세웠다. 전상균은 “역도 코치를 하고 있는 아내가 어릴 때부터 재미 삼아 가르쳤는데 본인이 흥미를 느껴 열심히 하고 있다”며 “아직까지는 채워야 할 게 많지만 언젠가는 올림픽 시상대에 설 수 있도록 성장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국가대표 선수 시절 그는 대표팀 전체를 통틀어 최중량 선수 타이틀을 도맡았다. 런던 올림픽 출전 당시 그의 몸무게는 165kg이었다. 먹고 싶지 않아도 힘을 키우기 위해 억지로 먹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은퇴 후 체중 조절에 나섰다. 그는 오전 4시면 기상한다. 경북 경산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많은데 그는 저수지를 돌며 유산소 운동을 한다. 무리하게 뛰기보다는 가볍게 뛰기와 걷기를 반복한다. 그는 “공복 유산소 운동이 체중감량에 많은 도움이 된다. 매일 하루 1시간에서 한 시간 반가량 저수지 주변을 돈다”고 했다. 그렇게 몸에 크게 무리를 하지 않고도 30~40kg을 감량했다. 그는 “올림픽 메달을 받고 딸 희수가 좋은 성적을 올리는 바람에 요즘 축하 자리가 많아 다시 살이 조금 쪘다”며 “좀 차분해지면 제대로 몸 관리를 재개할 것”이라며 웃었다.
여기서 평소 궁금하던 것 하나를 물었다. ‘헬창(헬스를 통해 몸 불리기에 열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3대 500(스쾃,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중량을 합쳐 500kg의 무게를 드는 것)’이 유행인데 그는 3대를 얼마쯤 들까 하는 것이다.
그는 따로 계산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다만 ‘3대 1000정도는 가뿐하지 않았을까’ 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전상균은 “바벨에 원반을 최대한 끼우면 320~330kg 가량 된다. 한창 선수 생활을 할 때는 바벨을 끼울 수 있는 데까지 끼운 뒤 스쾃와 데드리프트를 반복해서 훈련하곤 했다”고 했다. 벤치 프레스도 비슷한 무게를 든다고 가정하면 3대 1000은 훌쩍 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게에 대한 욕심을 경계했다. 그는 “역도와 웨이트 트레이닝은 순발력과 탄력을 모두 키울 수 있는 정말 좋은 운동”이라면서도 “하지만 무게를 올릴수록 부상 위험이 커진다. 특히 단기간에 무게를 올리면 큰 부상을 당하기 십상이다. 무게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조금씩 늘려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역도 선수와 지도자로 20년, 이후 10년을 회사원으로 살아온 그는 역도와 관계된 향후 인생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파리 올림픽에서 관중으로서 느꼈던 스포츠의 감동을 다시 팬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전상균은 “파리 올림픽에서 화제가 되면서 역도에 대해 새롭게 봐 주시는 분들이 많이 늘었다. 회사에서 역도팀에 대한 재창단에 대해 고려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며 “만약 역도팀이 다시 생긴다면 후배들 양성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역도를 통해 회사의 이름도 크게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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