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리부트: ‘사망 제로’를 향해] 〈8〉 생명 위협하는 고속도로 2차 사고
치사율 48.3%, 전체 사고의 37배… ‘비트박스’ 알면서도 현장 못 벗어나
美는 사고차량 발견 시 감속 의무화… “국내도 후속차량 감속 제도화해야”

순찰대 소속 최현석 경위(48)와 김성원 경장(42)은 곧바로 순찰차를 세우고 두 운전자에게 차량을 갓길로 옮기도록 안내했다. 두 승용차 모두 가벼운 추돌 사고여서 운전자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고, 차량도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 앞차 운전자 이성훈 씨(53)는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하면 즉시 차를 갓길로 옮기고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는 수칙을 알고는 있었지만, 고속도로 사고를 당한 건 처음이라 당황해서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 알아도 못 지키는 대피 요령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을 때 차를 움직일 수 있다면,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갓길 등 안전한 장소로 먼저 이동하는 게 기본 수칙이다. 이를 교통안전 당국에서는 ‘비트박스’라는 구호로 홍보한다. 사고가 나면 ‘비’상등을 켜고, ‘트’렁크를 연 뒤, 가드레일 ‘밖(박)’으로 대피해 ‘스’마트폰으로 신고하라는 행동 요령이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사고 차량의 위치와 파손 상태를 확인하거나 보험사를 기다리느라 차로에 그대로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 경위는 “사고 당사자는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고속도로에서는 차량 주변에 머무는 행동 자체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짧은 순간의 지체가 사망 사고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올해 1월 15일 오전 1시경 경기 화성시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방향에서는 30대 초반 남성이 몰던 화물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1차로에 멈춰 섰고, 뒤따르던 그랜저 승용차가 이 화물차를 추돌했다. 문제는 두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차로 위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약 1분 뒤 화물차 운전자는 또 다른 승용차에 치여 현장에서 숨졌다. 단독사고에서 2차 사고, 사망 사고로 이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분가량이었다.
최근에도 유사한 2차 사고가 발생했다. 14일 오후 11시 반경 인천 계양구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와 충돌해 멈춰 선 승용차를 뒤따르던 1t 트럭이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차량 밖에 나와 있던 20대 승용차 운전자가 숨지고 트럭 동승자 1명이 다쳤다.
● 전체 교통사고보다 치사율 37배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고속도로 2차 사고는 총 286건 발생해 138명이 숨졌다. 사고 건수 대비 사망자 수, 즉 치사율은 48.3%였다. 사고 2건 중 1건꼴로 사망자가 나온 셈이다. 같은 기간 전체 교통사고 치사율(1.3%)의 37배가 넘는다. 치사율이 이처럼 높은 이유는 시속 100km 안팎으로 달리던 후속 차량이 도로 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앞선 사고 당사자를 그대로 들이받는 경우가 많아서다. 차량끼리 부딪치는 사고와 달리, 후속 차량이 사람을 직접 충격하면 차체가 충격을 흡수해 주지 못해 사망이나 중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13일 고속도로순찰대와 동행해, 올 1월 2차 사망사고가 발생한 서해안고속도로 현장 인근 갓길에 순찰차를 세우자 대형 화물차와 승용차가 대화 소리가 묻힐 정도의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해당 구간은 제한속도가 시속 110km이기 때문에 갓길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느껴졌다.
최 경위와 김 경장은 차량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타이어나 휠이 추가로 손상되더라도 우선 갓길로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운전자와 탑승자는 차량 주변이나 가드레일 바로 옆이 아니라 도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갓길 역시 졸음운전 차량 등이 침범할 수 있어 안심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최 경위는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차는 버린다’는 생각으로 사람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며 “차는 수리할 수 있지만 후속 차량에 사람이 치이면 돌이킬 수 없다”고 말했다.
● 후속 차량도 속도 줄여야
고속도로 2차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고 당사자가 신속히 차량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것이 우선이다. 다만 사고 당사자의 대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고 위험을 더욱 낮추려면, 구조 차량이 도착하기 전 사고 차량을 발견한 후속 운전자도 즉시 속도를 줄이고 가능하면 차로를 변경하도록 제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국내 도로교통법에는 ‘도로 상황에 따라 안전하게 운전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의무와 긴급자동차에 대한 진로 양보 의무는 있지만, 사고 차량을 발견한 운전자가 차로를 바꿔야 한다거나 구체적으로 얼마나 속도를 줄여야 하는지를 정한 규정은 없다.
이주용 경기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우선 운전자에게 비트박스 행동 요령을 충분히 알리고 사고 발생 시 즉시 대피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고속도로에서는 사고 차량을 뒤늦게 발견할 가능성이 크고, 발견한 뒤 대응할 시간도 짧다”며 “이 때문에 사고 차량이나 비상등을 켠 정차 차량 주변에서는 후속 차량이 미리 속도를 줄이거나 차로를 변경하도록 행동 기준을 명확히 하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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