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가을밤, 경복궁과 노들섬에서 펼쳐진 발레의 향연

2 weeks ago 2

고궁에서 발레를 본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한강에 인접한 노들섬에서도 마찬가지. 지난 10월 둘째주 가을답지 않게 따스한 밤공기를 느낄 수 있었던 야외에서 환상적인 두 편의 발레 공연이 펼쳐졌다.

10월 10~13일. 반달이 호젓이 떠 있던 시기, 경복궁 집옥재에서 화려한 발레 춤판을 만나볼 수 있었다. 북악산에서 지내고 있다던 요정과 도깨비가 소리꾼의 호령에 등장하고, 현란한 춤사위로 관객을 홀렸다. '고궁음악회 발레X수제천(壽齊天)'의 무대의 한 장면. 궁중음악 수제천과 서양 궁중무용으로 탄생한 발레가 접목된 공연이다. 이 작품은 2022년 초연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발레단원들이 매해 완성도를 높여왔다. 발레 정재, 발레 판타지, 발레 비나리 등 3가지 마당으로 구성된 이번 공연을 즐기러 온 관객의 절반 이상은 외국 관광객이었다. 모든 무대의 음악은 라이브로 진행됐다. 국립국악원의 대금·소금 연주자 등 최고 실력자들이 ‘수제천 프로젝트’라는 팀 아래 모여 전통 음악의 진수를 선사했다.

집옥재는 경복궁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전각이다. 귀한 보배(玉)를 모은다(集)는 뜻을 가졌다. 고종은 이곳을 어진과 도서를 보관하며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활용했었다. 무대 예술감독인 조주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는 "2022년 처음 집옥재를 마주했을 때 역사적 공간의 아우라로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발레가 탄생할 것임을 직감했다"고 했다.

10월의 가을밤, 경복궁과 노들섬에서 펼쳐진 발레의 향연

발레 정재 (사진 제공: 한예종 무용원, ⓒ김윤식)

첫번째 마당 발레 정재에서는 황금빛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나타났다. 느린 박자에 절제된 매력이 있는 한국 전통의 궁중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이 몸을 움직였다. 고전 발레에서 발레리노가 도약하는 발레리나를 순식간에 들어올리는 리프트 역시 느린 호흡에 맞춰 이뤄졌다. 한국 무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손발의 동작도 발레에 많이 차용됐다. 기예에 가까운 신선한 발레의 향연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두번째 마당 '발레 판타지'는 객석 가운데 마련된 돌길 통로로 작은 날개를 단 요정들이 등장했다. 이어 도깨비 무리를 연기한 발레리노들이 등장해 창작 가야금 곡인 침향무에 맞춰 박진감 넘치는 춤을 보여줬다.

10월의 가을밤, 경복궁과 노들섬에서 펼쳐진 발레의 향연

발레 비나리 (사진 제공: 한예종 무용원, ⓒ김윤식)

셋째 마당 '발레 비나리'는 이날 공연의 백미였다. 용의 읊조림을 뜻하는 '수룡음(水龍吟)'에 맞춰 한 무용수가 독무를 췄다. 작년까지는 발레리나가 추었던 춤을, 발레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발레리노 전민철이 담당했다.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하기 전 크고 작은 무대를 가리지 않고 관객을 만나고 있는 그의 독무를, 관객들을 홀린듯 바라보았다. 폴드 브라(발레의 상체 움직임)를 비롯해 미려하게 움직이는 동작이 천상의 용을 연상케 했다. 발레리노지만 선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체형, 그만의 섬세한 표현력은 세계인의 마음을 흔들 대스타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전민철의 무대가 끝난 뒤 곧바로 사물놀이 장단이 들려왔다. 붉은 옷을 입은 발레리노들이 타악 장단에 맞춰 힘차게 도약하는 마네쥬를, 발레리나들 역시 가녀린 선으로 그려낼 수 있는 역동의 끝을 보여줬다. 조주현 예술감독은 “동서양 위대한 예술가들이 오늘날 전해주신 소중한 선물을 융합해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다”며 “우리의 고궁예술이 우리 민족 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영원히 사랑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소감을 전했다.

10월의 가을밤, 경복궁과 노들섬에서 펼쳐진 발레의 향연

한강 노들섬 발레 무대 전경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

10월 12~13일에는 유니버설발레단이 실내 대극장을 벗어나 서울 한강 노들섬 잔디마당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공연했다. 무더위에도 지난 여름, 이 발레단이 쉬지 않고 전국 순회를 돌던 그 작품이다. 오전에 비가 내린 탓에 미끄러운 무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백조의 호수를 보여줬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하루종일 날씨가 맑았다. 저녁에도 가을밤 답지 않게 따뜻했기에 무용수들은 좀 더 정돈된 모습으로 노들섬을 찾아온 관객을 맞이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는 수석무용수 홍향기와 이유림, 이동탁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오로라 공주와 데지레 왕자를 맡았다. 홍향기와 이유림은 16세의 오로라 공주를 소녀답고 사랑스럽게 표현했고 이동탁과 노보셀로프는 고전 발레 속의 파리하지만 용맹한, 정석적 왕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한강에 울려퍼지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수변과 어울리는 숲 속 무대 연출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였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정들은, 그들이 꾸미는 장면들이 로맨틱한 한강의 밤과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유니버설발레단 외에도 와이즈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소속 무용수가 함께 무대에 올라 성대한 발레 잔치를 완성했다. 잠에서 깨어난 오로라 공주가 데지레 왕자와 함께 추는 2인무는 공연의 낭만을 절정에 치닫게 했다. 관객들은 저마다 감탄과 박수로 아름다운 발레에 대한 호응을 보냈다.

10월의 가을밤, 경복궁과 노들섬에서 펼쳐진 발레의 향연

노들섬에서 펼쳐진 유니버설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무대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

클래식 발레의 정수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발레 무용수의 교과서라고도 불린다. 공주가 마녀의 저주에 빠져 깊은 잠에 빠졌다가 왕의 키스로 깨어나는 쉬운 줄거리를 가졌지만, 원래 공연은 3막(125분)으로 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두시간 반에 이르는 대작이다. 무용수나 발레단에게 만만치 않은 공연인 셈이다. 노들섬 한강 발레에서는 발레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야외인 점을 감안해 공연 길이를 95분으로 압축적으로 줄였다. 무대 소품도 최소화했고 대형 발광다이오드를 활용해 실내와는 확연히 다른 무대 연출을 보여줬다.

다만 두 무대 모두 정신 공연장이 아니다 보니, 객석은 불폄함을 감수해야했다. 고궁 앞마당은 단차가 없어 앉은 키나 머리가 큰 관객이 앞에 앉았을 때 전체적인 무대를 감상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노들섬 객석도 VIP석이 아닌 경우는 등받이가 없어 허리가 쉽게 피로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노들섬 공원에서도 단차가 없었는데 1층의 좌석에선 무용수들의 발을 보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2층이 전체 무대를 조망하기에 좋았다. 짧은 가을을 만끽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축제의 소리가 섞여 들어와 몰입을 때때로 방해한 점, 야외인 만큼 어수선한 관람 분위기, 야생 벌레떼들의 등장은 두 공연에서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해원 기자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