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법관대표회의 결국 빈손
90명 참석한 2차 임시회의
상정된 안건 5개 모두 부결
李사건 대법원 파기환송엔
"진행사건 의견 표명 부적절"
'사법부 흔들기에 침묵' 비판도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과 관련해 대법원의 파기환송이 촉발한 전국법관대표회의 임시회의가 결국 아무런 입장 표명 없이 빈손으로 마무리됐다. 지난달 말에 이어 진행된 2차 임시회의 투표 결과 상정됐던 5개 안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법관대표회의는 공식 입장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미 대통령선거가 끝났고 사법부를 향한 정치권의 압박이 잦아든 상황에서 법관대표회의가 관련 사건에 목소리를 내는 데 부담이 컸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관대표회의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원격으로 2차 임시회의를 진행했다. 5월 26일 1차 임시회의 개최 이후 35일 만이다. 전체 법관대표 126명 중 절반 이상인 90명의 출석으로 열린 이날 임시회의에서는 지난 회의 때 상정된 총 7개 안건 중 중복된 내용을 통합한 5개 안건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지만 모두 부결됐다.
안건별 투표 결과는 반대가 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가 초래한 상황을 엄중히 인식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공정한 재판을 위해 노력함을 천명한다는 첫 번째 안건은 찬성 29명·반대 57명으로 부결됐다. 해당 안건에 통합된 '전합 판결에 대한 과도한 책임 추궁이 재판독립을 침해할 가능성을 깊이 우려한다'는 내용은 찬성 29명·반대 56명으로 부결됐다.
판결한 법관에 대한 특검·탄핵·청문 절차 재발 방지 촉구는 찬성 16명에 반대 67명, 사법의 정치화를 막고 이에 대한 연구 및 논의 진행 필요성 안건은 찬성 18명에 반대 64명으로 통과되지 못했다.
재판독립 보장과 재판에 자유·평등·정의가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긴 안건은 찬성 14명에 반대 67명, 법관대표회의 차원에서 분과위원회를 통해 제도개선안에 대한 연구·논의를 진행한다는 안건은 찬성 26명에 반대 57명으로 부결됐다. 이에 따라 이 대통령의 과거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파기환송과 관련해 법관대표회의 입장을 표명하자는 안건과 사법권 및 재판독립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자는 안건 등은 모두 부결됐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 표명에 반대한 법관대표들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한 의견 표명은 부적절하고 법관 판단은 최대한 존중돼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 법관대표회의 공식 입장 표명을 두고는 "대의제기구인 법관대표회의 명의의 집단적 의견 표명은 부적절하고 의결 내용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나왔다.
앞서 법관대표회의 임시회의 소집을 두고 사법부에서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이뤄졌던 대법원 전합 선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의견과 "진행 중인 재판에 대한 의견 표명은 자제해야 한다"는 반론이 대립해왔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조희대 대법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의견과 임시회의 소집 결정이 성급하다는 목소리가 맞붙기도 했다.
결국 법관대표회의가 입장 표명 대신 침묵을 선택한 것과 관련해 법조계에서는 법관대표들이 당장은 자중하고 앞으로 상황을 신중하게 지켜본 뒤 입장을 내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임시회의 소집 여부를 결정할 투표 당시에는 대법원의 파기환송 이후 대선을 앞두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이 대통령에 대한 재판들이 연기됐고 조 대법원장 사퇴와 대법관 증원 등에 대한 정치권의 사법부 압박 수위도 낮아진 만큼 굳이 대립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다. 한 법원 관계자는 "정치권 압박이 법관대표회의 투표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대선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법원이나 정치권이 신중 모드로 돌아선 만큼 서로 자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정치권의 사법부 압박에 대한 안건도 모두 부결된 것에 대해서는 사법부가 지나친 저자세 행보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사법부 흔들기에도 법관대표회의가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정치권의 사법부 길들이기가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박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