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으로 샛노란 들꽃들이 만개한 도로. 창문을 내리자 뜻밖의 허브 향이 상쾌하게 밀려들어 온다. 시칠리아 내륙, 에나(Enna) 고원의 구릉지다. 이탈리아 주도 중 가장 높이 자리한 이 내륙 고원은 해안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청아한 연두빛 초록이 광활한 밀밭을 뒤덮고 있다. 봄기운이 물결치는 구릉지대 사이로, 에트나 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얀 망또를 걸친 모습이다. 눈인지 화산재인지, 차 안에서는 추측과 주장이 난무한다.
논나의 맛 비결을 찾았다
직접 기른 올리브로 짜낸 올리브오일, 논나의 레시피로 차려주는 아침. 토스카나에서 처음 돌로 지어진 고성 같은 농가에서 숙박한 후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이탈리아식 농장 숙박)를 계속 찾게 된다. 머무는 동안 그 땅의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자연환경이 식탁과 체류 경험으로 구현되는 곳이다.
에트나 근처 ‘La Fattoria Dei Nonni’. 논나(nonna, 이탈리아어로 할머니)의 농장이라는 뜻이다. 아침 식사가 훌륭하다는 후기가 많아 고민 없이 예약했다. 도착하자 어두컴컴해진 숙소 근처에는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 예약을 미리 못 했음에도 호스트는 토마토 파스타를 내어준다. 오랜만에 맛보는 순도 높은 토마토 소스다. 한국에서 본토의 맛을 최대한 내려고 토마토를 장시간 오븐에 굽고 냄비에 끓이곤 한다. 논나의 비결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깊은 맛이 날까. 호스트 안젤라(Angela)는 준비된 게 없다면서도 이것저것 계속 내어준다. 식당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 논나의 손맛과 손님을 가족처럼 환대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나 보다.
다음 날, 아침 식사 담당이라며 마리아가 인사를 건넨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며 수줍게 웃었다. 갓 내린 커피와 직접 짠 레드 오렌지 주스를 건넨 뒤, 곱게 땋아진 유청에 담겨 있는 모짜렐라 치즈부터 하나하나 소개한다. 새빨간 토마토가 탐스럽게 올라간 브루스게타, 먹기 좋게 잘라진 딸기로 식탁은 생기가 넘친다.
다양한 종류의 크루아상과 여리한 연분홍빛 슬라이스 햄까지, 모든 게 신선하다. 어제저녁의 소박하지만 풍성한 기운이 흘러넘친다. 활기 가득한 아침 식탁으로 이미 에트나를 섭렵한 것 같았다. 에트나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살아 숨 쉬는 활화산이 비옥한 떼루아의 비결이라는 걸 깨닫기 전이었다.
예측불허 에트나, 날씨 요정은 어디에?
에트나 화산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케이블카를 이용하거나 트레킹을 원하는 구간만큼 할 수 있다. 헬리콥터 투어도 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케이블카를 운영하지 않는다. 활동 중인 화산이므로 당일 상황에 따른 운영 정보를 공식 사이트에 올린다고 한다. 입구에서 투어 프로그램을 파는 가이드도 "올라가면 아무것도 안 보일 것"이라며 동굴 투어를 추천한다.
기상은 염원과 의지로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티베트 남초 호수에서 아무것도 못 보고 내려왔었다. 24시간 기후와 고산증에 혹독하게 시달리기만 했어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일까. 올라가 보기로 한다. 케이블카로 바라보는 에트나의 모습도 멋있겠지만, 버스 높이만 한 좁은 빙벽 사이를 구불거리며 올라가는 경험이 꽤 흥미롭다. 케이블카로 도달했어야 할 2500m 지점에 내린 뒤, 더 올라가기 위해 설상차로 갈아탔다.
4x4, 사륜구동 무한궤도 기계다. 탱크처럼 생겼는데, 올라타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힘차고 묵직하게 돌진하며 설원을 파고든다. 엔진 진동과 소리를 온몸으로 받는다. 눈이 충분할 때만 탈 수 있는 설상차를 탔으니 불확실함을 선택한 것을 보상받은 기분이다. 소복이 쌓인 눈 평지 위를 줄을 지어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인다.
3000m 고도에 이르러 마주한 광경은 묘하다. 검은 화산토와 얇게 쌓인 눈이 교차하는 땅 위로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분연과 구름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움직인다. 눈이 쌓여 있는데도 곳곳에 드러난 화산토 바닥에 손을 가져다 놓으니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산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은 좀처럼 갤 기미가 없어 보인다. 찰나의 순간, 구름이 걷히고 발아래로 카타니아 시가지와 그 너머 지중해가 납빛으로 펼쳐진다.
저지대의 꽃과 녹음, 고지대의 잔설과 안개를 동시에 겪고 있으니, 지상에 없는 계절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불현듯 23km 구간 동안 사계절을 경험했던 파타고니아 트레킹이 떠올랐다. 고도에 따른 미세한 기후 변화 속에 동면 상태였던 몸의 감각들이 깨어난다. 간식거리 없이 무방비 상태로 올라가서일까. 설상차를 타고 다시 내려와 케이블카 정류장 카페에서 파니니로 허기를 채우고 나니, 머릿속에 떠오르던 오레오 쿠키의 잔상이 드디어 잠잠해졌다.
살아있는 화산으로 빚어진 떼루아와 문화
유네스코는 에트나를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성층화산 중 하나이자, 인류가 2700년 이상 기록해 온 화산으로 설명한다. 정상에는 분화구부터 분석구, 용암류 같은 지형이 다양하다. 온도가 차갑지 않은데 눈은 녹지 않는 게 신기하다. 화산의 열이 특정 구역에만 국지적으로 작용하고, 3000m 고도의 기온이 그 열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소복이 쌓인 눈은 천천히 화산토 안으로 스며들어 용암석을 통과한다.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미네랄을 품은 지하수가 된다.
화산토와 고도, 일교차와 미세기후. 이 조건이 에트나 떼루아와 고유한 농작물의 토대가 된다. 저지대는 포도, 올리브, 피스타치오, 감귤 재배가 활발하다. 식사 때 곁들였던 에트나 DOC 와인의 뚜렷한 미네랄 덕분에 매끼 파스타를 거뜬히 해치웠다. 피스타치오 크루아상도 질리지가 않는다. 부담스러운 크림의 묵직함이 아닌 피스타치오 원물의 진한 향이 풍미를 채워서일까. 크림 자체가 부드럽고 산뜻하다. 시칠리아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화산토의 맛을 누리고 있었구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저지대로 내려오니 어느새 꽃들이 만발한다. 노란 국화과인 줄 알았는데, 키가 큰 관목과 우산처럼 퍼진 형태도 보인다. 검색을 해보니 봄철 지중해에 만개하는 노란색 들꽃 종류가 많다. 데이지류부터 감초 향이 나는 야생 회향까지. 허브 향이 진동하는 이유다. 얼핏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데, 다양성이 더 아름다운 경관을 완성하고 있다. 계속되는 지질 작용이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에트나의 본 모습이다. 극단적인 조건이 에트나만의 토양과 식생, 풍경을 만들고, 곧 문화와 유산이 됐다.
에트나를 뒤로하고 도착한 타오르미나는 치명적으로 아찔한 절벽 위에서 화려함을 한없이 뽐내고 있다. 벨몬드, 포시즌스 호텔과 디올, 루이비통 매장 사이에서 저 멀리 문득문득 보이는 하얗고 검은 얼룩박이에 괜히 더 눈길이 간다. 누군가에게는 이유 없이, 자꾸만 마음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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