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의미는 강인함·용기
레오 13세 교황 정신 계승
1955년 미국 시카고서 출생
선교활동 중 페루 국적 취득
개혁·보수 균형 맞출 중도파
“분열된 교회 다리 역할” 기대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La pace sia con tutti voi).”
끝나지 않는 전쟁과 전염병, 자연재해, 양분된 사회 등 수많은 과제가 쌓여 있는 우리 사회에 영적 생명을 불어넣어줄 새 교황의 첫 메시지는 평화였다.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 이틀째인 8일 오후(현지시간) 시스티나 성당은 ‘흰 연기’를 뿜으면서 제267대 교황의 탄생을 알렸다.
주인공은 그동안 교황 불모지이자 개신교 국가인 미국 태생의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다. 첫 미국인 교황 탄생에 가톨릭 세계는 놀라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유럽이 주도하는 추기경단은 미국인을 선출하지 않는 것이 오랫동안 상식이었다”면서 “미국은 세계에서 너무 강력해서 성 베드로의 왕좌에 미국인을 앉힐 수 없다고 여겨졌다”고 전했다.
주요 베팅 업체들에 따르면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교황에 오를 확률은 1%에 불과했다. 하지만 균형적 자질과 온화한 성품이 그를 교황으로 이끌었다. 개혁파로 평가받는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측근이면서도 신학적으로는 중도 성향이어서 교회 내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인물로 평가받는다.
BBC는 그가 분열된 교회에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 개혁을 추진해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 동시에 진보파로부터는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BBC는 “프레보스트 추기경은 서로 다른 세계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후보자로 여겨졌다”면서 “단 4차례 투표에서 교황이 선출됐다는 것은 추기경들이 그 평가에 동의했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그는 여성의 교회 내 역할 확대와 투명한 주교 임명 절차,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 등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요 정책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해왔다. 하지만 낙태와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는 등 프란치스코 교황과 비교해 중도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이념적 긴장을 완화하고 싶어 하는 많은 추기경의 선택으로 이어졌다고 분석된다.
그가 앞으로 사용할 교황 즉위명은 ‘레오 14세’다. 레오는 라틴어로 ‘사자’를 뜻한다. 강인함과 용기, 리더십을 상징한다. 마테오 브루니 교황청 대변인은 새 교황명 레오 14세는 19세기 말 노동권과 사회 정의를 강조한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을 계승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노동자 권리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를 시사한 대목이다.
1955년생으로 미국 시카고 태생인 레오 14세 교황은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일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서 교황을 배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유로뉴스는 전했다. 레오 14세는 미국 국적이지만 20년간 페루에서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2015년 페루 시민권을 취득하고 같은 해 페루 대주교로 임명됐다.
미국인이면서도 빈민가 등 변방에서 사목한 그의 발자취가 교황 선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탈리아 일간 신문 ‘라 레푸블리카’는 레오 14세를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이라고 묘사했다. NBC에 따르면 레오 14세는 미국과 페루, 바티칸 국적을 갖고 있다.
레오 14세는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교황청 주교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또 같은 해 추기경에 선임됐다. 이처럼 전임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임을 받기도 했지만, 이날 그는 교황 선출 후 첫 공식 행사에서 전통적 복장인 진홍색 모제타(어깨 망토)를 착용하고 등장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선출 당시 너무 화려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복장이다. 이를 두고 전통으로의 회귀를 어느 정도 암시한 것이라고 AP통신은 해석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이날 선출 확정 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강복의 발코니’로 나와 이탈리아어로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이라고 첫 발언을 했다. 또 오랜 기간 사역한 페루 공동체를 위해 스페인어로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모국어인 영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자국 출신 교황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접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트루스소셜을 통해 “첫 번째 미국인 교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말로 영광”이라며 “나는 레오 14세 교황을 만나길 고대한다”고 밝혔다. 가톨릭 신자인 J D 밴스 부통령과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도 레오 14세 교황을 반겼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레오 14세 교황 선출을 축하했다. 유럽연합(EU) 지도부를 비롯한 유럽 각국 정상들도 축하 메시지를 잇달아 내며 기대감을 표했다.
레오 14세 교황의 즉위식은 며칠 내 거행될 예정이다. 앞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5년 4월 19일에 선출되고 닷새 뒤인 24일 즉위식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3월 13일 선출돼 엿새 뒤인 19일 즉위식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