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 행정부에서 상무부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가 최근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처음엔 미국의 고질적인 재정적자 문제를 또 꺼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얘기는 낡은 회계장부를 들춰 보는 수준이 아니었다. 감세와 관세, 복지 축소, 이민 단속으로 이어지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치 문법, 곧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진단이었다.
미래 자산을 현재로 끌어온 정치
정치는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오늘을 희생하더라도 10년 뒤의 성장과 안정을 준비하는 정치가 있다. 교육과 연구개발, 사회간접자본,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그렇다. 당장은 성과가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국력이라는 자산으로 축적된다.반대로 미래의 자산을 현재로 끌어와 지지율과 박수로 바꾸는 정치도 있다. 최근 워싱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후자에 지나치게 기울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의 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다. 긴 설명보다 강렬한 장면을, 복잡한 제도보다 직관적인 구호를 선호한다. 관세는 ‘미국을 지키는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만들었고, 감세는 즉각적인 혜택으로 체감됐다. 강경한 이민 단속은 국경 질서를 회복했다는 상징으로 소비됐다.
미래는 추상적이지만 현재는 구체적이다. 10년 뒤 국가부채보다 이달 세금이, 장기적인 경쟁력보다 지금의 체감 효과가 유권자의 눈을 현혹한다. 특히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이러한 정치의 본능을 누구보다 능숙하게 활용했다. 문제는 국가 운영에는 마술이 없단 점이다. 오늘 줄인 세금은 언젠가 재정적자로 돌아오고, 오늘 미룬 투자는 내일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관세는 공급망 혼란과 물가 상승, 동맹 신뢰 훼손이란 또 다른 비용을 남긴다. 비용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간과 장소만 바뀔 뿐이다.국가는 부동산 프로젝트가 아니다
물론 이런 정치가 트럼프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앞서 민주당은 복지를 확대하면서 재원 확보를 뒤로 미뤘고, 공화당도 감세에 매우 관대했다. 다만 트럼프 시대 들어 이런 경향은 훨씬 더 직설적이고 속도감 있게 나타나고 있단 평가가 지배적이다. 장기적 설계보다 즉각적인 체감 효과를 우선시하는 정치가 그의 리더십 아래 더욱 선명해졌단 의미다.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에게 시간은 언제나 거래의 대상이었다. 미래의 가치를 현재 가격에 반영하고, 내일의 수익을 담보로 오늘 투자하는 것이 그의 성공 방식이었다. 정치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읽힌다. 다만 국가는 부동산 프로젝트가 아니다. 건물은 팔고 떠날 수 있지만, 국가는 다음 세대가 계속 살아갈 공동의 집이다.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이 된 것은 먼 곳을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과 연구소, 고속도로와 인터넷, 우주개발과 기초과학은 수십 년 동안 미래를 위해 현재를 견딘 결과였다. 강대국의 힘은 화려한 발표가 아니라 오랜 축적에서 나온다.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기업과 대학,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 써야 할 자산을 오늘의 정치적 성과로 바꾸기 시작하면 균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생길 수밖에 없다.
강대국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미래를 현재의 정치에 저당 잡히는 순간, 국가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마련이다.
신진우 워싱턴 특파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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