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과 실용의 정치 아이콘
독일 16년 이끈 메르켈 전총리
유럽 재정위기·코로나 대응
사실상 EU의 리더로 맹활약
난민 수용결정에 정치적 타격
세계 정상들과 막전막후 기록
2015년 9월 4일 금요일은 유럽 역사에 기록적인 날이었다. 당시 시리아 내전을 피해 매일 수천 명의 난민이 서발칸반도를 거쳐 서유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헝가리는 펜스를 설치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70)는 최근 출간한 회고록 ‘자유: 1954-2021년을 회상하다’에서 난민 입국을 허용한 날을 아침부터 자정까지 자세히 묘사했다. 그는 “그날 아이패드로 부다페스트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으로 걸어가는 수많은 난민 행렬을 보았다”며 “마침내 결정의 시간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날 자정 독일은 페이스북을 통해 난민 입국 허용을 발표했다.
메르켈의 이 결정은 그에게 ‘난민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안긴 인류애적 포용이었지만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으며 유럽에서 극우가 부상하는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그 역시 서문에서 “난민 허용 결정과 그 이후의 파장은 내 총리직에서 일종의 전환점이었다”며 “언젠가 총리를 그만두면 이 사건들의 경과와 내 결정의 동기, 소신을 설명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난민 사태가 회고록 집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1954~2021’은 그의 출생연도와 총리 퇴임연도다. 2005년 독일 역사상 첫 여성, 첫 동독 출신, 첫 이공계 출신 총리로 선출된 메르켈은 독일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퇴임 직전까지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독일인들은 편안하고 소탈한 그를 ‘무티(mutti·엄마)’라 불렀다. 5860일, 장장 16년간 총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다.
그의 난민 결정은 숱한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가장 강력한 비판자는 대서양을 넘어 대선을 치르는 미국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였다. 그는 “(트럼프는) 내가 2015년과 2016년에 너무 많은 난민을 받아들여 독일을 망쳤다고 주장했고, 독일이 국방비를 너무 적게 지출한다고 트집 잡았다”며 “나는 미합중국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선거전에 독일 총리를 끌어들이는 것이 놀라웠다”고 기록했다.
앙숙인 이 둘의 관계는 2017년 3월 17일 백악관에서 열린 첫 정상회담에서 ‘악수 패싱’ 논란으로 이어졌다.
“그(트럼프)에게 다시 한번 악수하자고 속삭였다. 나의 은근한 말에도 그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는 자신의 행동으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자 했고, 반면에 나는 마치 내가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척했다.”
메르켈은 이어 “그는 푸틴에게 푹 빠진 듯했다. 이후 몇 해 동안 나는 트럼프가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성향의 정치인들에게 매료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맹비난했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객관적인 톤을 유지하던 회고록은 유독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감정적이고 격정적 어조로 바뀐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정치에 뛰어들기 전 부동산 사업을 했는데, 이후에도 모든 것을 부동산 사업가의 눈으로 판단했다. 그에게 모든 국가는 경쟁관계였고, 한 나라의 성공은 다른 나라의 실패를 의미했다. 나는 유럽연합과 한국의 자유무역협정을 예로 들며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상호 이익을 이야기했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자신이 협상에 나서지 않은 모든 협정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지각 대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그에게 골칫거리였다. 2007년 G8 정상회담 기념 촬영에서 푸틴이 45분 늦자 그의 머릿속은 분노로 가득찼다. “내가 참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다. 푸틴은 왜 이러는 것일까? 누구에게 뭘 증명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나는 겉으론 다른 사람들과 편안하게 수다를 떠는 척했지만, 속으론 화가 치밀었다.”
16년 재임 기간 내내 파도가 밀려오듯 시련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영국 브렉시트, 난민 사태, 코로나 등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그의 결단을 기다렸다. 독일의 탈원전 정책과 러시아 천연가스에 대한 지나친 의존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퇴임 후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에너지 대란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는 “돌이켜보면 원자력에 찬성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평화를 지키려던 나의 시도는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어쨌거나 풀 수 없는 과제였다”며 “러·우 전쟁 전에 러시아산 가스의 수입 축소 결정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계를 시인했다.
그의 자서전은 이처럼 실패의 기록도, 부끄러웠던 순간도 빠짐없이 들어 있다. 그가 물리학을 선택한 것은 성적은 뛰어났지만 목사의 딸이기에 대학 적성검사에서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캠퍼스 커플이었지만 이혼하고 나서 담배를 입에 물게 된 일, 첫 남편의 성을 따른 것,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정치에 발을 들인 일, 장관 시절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 신문에 크게 실리면서 금연에 이르게 된 일,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에 우물쭈물했던 일화, 자신의 치부를 공격받을 때는 버티고 인내했다는 고백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물리학도 출신 정치인답게 그는 자신을 이렇게 평가한다.
“나는 가능한 한 항상 객관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스타일이었다. 장점이 단점보다 51:49의 비율로 크면 타협에 나서는 쪽을 택했다. 세상은 흑백인 경우가 드물었다.”
타협과 실용의 리더십을 보인 메르켈이 롱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자유: 1954-2021년을 회상하다, 앙겔라 메르켈 지음, 박종대 옮김, 한길사 펴냄, 3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