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경건하게 엄수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는 비공식 대규모 외교의 장이 열리는 계기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에마뉘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등 주요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흔치 않은 장면이 연출됐다.
교황청은 이 행사에 국가 원수50여명과 군주 10여명이 참석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과 윌리엄 영국 왕세자 등 군주와 왕족도 참석해 웬만한 정상회의보다 규모가 큰 외교 행사로 보일 만했다.
푸른 양복을 입은 트럼프 대통령은 검은 베일을 쓴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귀빈석 맨 앞자리에서 지난 21일 선종한 교황의 관이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광장으로 운구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트럼프 대통령 부부와 같은 벤치에는 펠리페 6세 부부가 앉았다. 트럼프 부부 옆 벤치에는 마크롱 대통령과 브리지트 여사가 자리했다.
러시아의 키이우 공습으로 참석이 불투명했던 젤렌스키 대통령과 올레나 젤렌스키 여사도 참석했다. AP 통신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등장하자 군중이 박수를 보냈다고 전했다.
각국 정상들은 우크라이나 분쟁, 기후위기 등 국제 현안을 두고 이견을 내거나 갈등을 겪고 있지만 교황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였고, 실제로 외교적 대화를 나누며 '조문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 협상을 중재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장례 미사에 앞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짧게 회동했다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변인이 말했다. 백악관도 회동 사실을 확인하며 "매우 생산적인 논의를 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우크라이나를 전폭 지원했던 조 바이든 전 미 대통령 부부도 모습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전 대통령, 젤렌스키 대통령이 한 행사에 모인 것은 이례적이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마크롱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도 인사했다. 미국의 종전안을 두고 유럽과 우크라이나가 불만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협상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대화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도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했는데 이는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두 정상의 첫 만남이다. 유럽과 미국은 우크라이나 문제 외에도 관세 문제로도 갈등을 겪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대신해 올가 류비모바 문화장관이 참석했다. 또 다른 주요 분쟁 지역인 중동의 이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서는 각각 압바스 살레히 문화장관, 야론 시데만 주교황청 대사, 무함마드 무스타파 자치정부 총리를 대표로 보냈다.
이밖에 바티칸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등도 장례 미사를 지켜봤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등도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민관합동 조문사절단이 파견됐다. 오현주 주교황청 한국대사와 안재홍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장이 사절단원으로 동행했다. 염수정 추기경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이용훈 주교, 홍보국장인 임민균 신부 등이 한국 천주교 조문단으로 참석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