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반도체의 횡재, 타국 기업들 이윤 고인 것
그 초과이윤 어떻게 나눌지 토론하는 한국
타국 정상들, 마냥 웃으며 지켜보지 않을 것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말에는 두 개의 힘이 있는 것 같다. 메시지 자체에 담긴 고민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그래서인지 타 기업 경영자 발언보다 대중 흡수력이 좋다. 시장과 언론에서 빈번하게 회자되며 말에 실리는 힘이 커진다.
K메모리가 호황 사이클에 진입하던 2016년에도 그는 메시지가 많고 집요했다. 서든데스(Sudden Death)와 딥 체인지(Deep Change)가 대표적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기업의 경쟁 환경이며, 이에 대비해 파괴적 혁신을 경주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당시 반도체 산업 취재를 담당했던 기자는 호황 국면에서 경계감을 다잡는 그의 메시지가 뜬구름 잡기로 들렸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의 서든데스와 딥 체인지는 SK의 자기실현적 주문으로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정유·화학 중심의 내수 그룹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SK하이닉스가 참 많은 것들을 설명한다.
그런 최 회장이 지난 주말 K반도체의 역풍론을 꺼내 들었다. 한마디로 K반도체가 미운털이 박힐 수 있다는 염려다. 늘 하는 경계성 주문으로 흘려들을 수도 있겠으나, 과거 서든데스와 딥 체인지가 보여준 귀납적 효용성을 떠올리고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
최 회장은 지금의 메모리 시장 가격이 비정상임을 자인하며 “속칭 ‘칩플레이션’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이것이 계속되면 저희가 공적이 된다”고 했다. 핵심은 “저희가 공적이 된다”는 대목이다.
얼마 전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가 쓴 “백 년 만의 홍수(a hundred-year flood)”가 K반도체 공적론의 전형이다. 팀 쿡은 메모리 반도체 가격 폭등에 따른 자사 완성품 소비자 가격 인상을 토로하며, 그 책임을 철저히 외부 환경의 탓으로 돌렸다.
특정 회사를 거론하진 않았지만 그의 말에서 시장은 ‘백 년 만의 홍수’라는 재난을 일으킨 주범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두 기업이 주도하는 칩플레이션은 글로벌 완성품 고객사와 경쟁사들의 수익성을 급격하게 갉아먹는 중이다.
당장 기자가 애플에 고용된 경쟁법 전문가라면 K반도체의 이윤압착(Margin Squeeze) 여부를 조사해 달라고 은밀히 미국 반독점 당국에 요청할 터이다.
스퀴즈(쥐어짠다)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불공정 행위 개념은 제조업의 상류(부품·원자재)를 장악한 기업이 수직계열화라는 특성을 이용해 하류(완성품) 시장에서 자사의 공급망 경쟁력을 이용해 경쟁사의 마진을 고갈시키는 전략이다.
이현령비현령이 될 수 있는 이 반독점의 덫에 특히 유념해야 할 곳이 삼성전자다. 세계 1위의 메모리 공급자이면서, 스마트폰과 PC를 만드는 완성품 제조사다.
이렇듯 강력한 수직계열화 구조를 갖추고 있으므로, 내부 공급 가격을 시장가보다 현저히 낮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자사 스마트폰과 PC의 가격 경쟁력을 부당하게 끌어올린다는 경쟁사의 투서가 쏟아질 수 있다.
관련해서 애플은 트럼프 행정부에 비정상적인 메모리 반도체 가격 문제를 이유로 중국산 메모리 제품 사용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중국산을 써야 할 만큼 궁박한 처지를 호소하려면 애플은 트럼프 행정부에 공급망 지배력을 쥔 한국의 기업들에 대해 반독점 문제를 집요하게 거론할 유인이 크다.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업의 본능이다.
제도적 규제보다 무서운 것은 정치적 압박이다. 미국은 물론 유럽 국가들도 한국이 누리는 막대한 메모리 호황을 불편하게 바라보며 지정학적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AI 패권을 국가안보와 동일시하는 흐름 속에서 그 패권에 부담을 주는 한국 메모리 기업들을 마냥 곱게 바라볼 리 없다.
어제 이재명 정부가 기업 초과이윤을 어떻게 나라 살림에 보태 쓸지를 논의하는 토론 자리를 준비했다가 당일 갑작스럽게 연기했다.
다른 나라 기업의 이윤이 깔때기처럼 한국 반도체의 횡재를 연출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초과이윤의 사회적 배분’이라는 작명으로 토론회를 벌이는 모습을 과연 다른 나라 정책 당국자들은 어떻게 볼까. 꽤 많은 나라가 인내심의 바닥을 경험할 것이다.
운도 실력도, 미운털이 생기면 순간 훅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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