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노린 디지털 성범죄… 시작은 ‘나도 아이돌 좋아해’”[N번방 너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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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이정한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N번방’부터 ‘서울대 딥페이크’, ‘목사방’ 사건까지. 디지털 성범죄는 이름만 달라졌을 뿐 반복되고 있습니다. 최근 5년 사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8배, 10대 피해자는 26배나 급증했습니다. 피해자는 종종 ‘내 인생은 끝났다’고 절망하지만, 그 곁을 지키는 이들도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손을 내밀고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기 위해 뛰는 사람들. <N번방 너머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최근 아동·청소년을 노리는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는 처음부터 성적인 접근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데, 가해자는 그걸 단서 삼아 다가갑니다. 특정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하면 ‘나도 그 아이돌 좋아해’라며 말을 걸고 굿즈를 사주며 친해집니다.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는 글을 올린 아이에겐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많이 힘들겠다’고 위로하면서 다가갑니다. 그렇게 신뢰를 쌓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신체 사진을 요구합니다.”

이정한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는 최근 급증하는 아동·청소년 디지털 성폭력 피해 핵심은 ‘온라인 그루밍(Online Gromming·관계를 성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디지털 기기나 인터넷 등으로 관계를 쌓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 현재 서울 해바라기센터(아동형) 소장을 맡고 있다. 센터는 성폭력 피해를 본 아동·청소년에게 상담과 의료, 법률 지원 등을 제공하는 곳이다. 여성가족부가 연세대 의료원에 위탁해 운영하고 있다.

이 교수는 “센터를 찾는 피해 아동·청소년 중 절반 이상이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라며 “특히 온라인 그루밍을 빼놓고는 피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연세대 의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나 그루밍 피해의 특징과 부모가 꼭 알아야 할 점에 대해 들어봤다.

이정한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제공.

이정한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제공.

● “좋은 사람이라 믿었는데”… 신뢰 무너지는 경험

―그루밍 피해를 보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던데.
“그렇다. 예전에는 주로 중학생 이상이었지만 지금은 초등학생 피해가 크게 늘고 있다. 초등학생을 상대로 성인이나 중고교생이 그루밍을 한다. 초등학생은 낯선 사람 의도를 구분하는 판단력이 부족하다. ‘내 요구를 안 들어주면 부모님한테 대화 내용 다 말할 거야’ 같은 협박도 어른이 보기엔 허술하지만, 아이들에겐 큰 위협이 된다.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경우가 많다.”―어떤 아이들이 그루밍에 취약한가.
“주의력결핍 과다 행동장애(ADHD)가 있는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아서 새로운 누군가가 말을 걸면 확 빠져들 수 있다. 물론 ADHD가 있는 모든 아이가 피해를 당할 위험이 크다는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울함이나 불안을 많이 느끼는 아이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루밍 가해자가 내미는 손길을 쉽게 뿌리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아이들이 성인 피해자와 구분되는 점은.
“아이들은 어른보다 죄책감을 훨씬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부모에게 혼날까 봐 두려워 더 숨기기도 한다. 대부분 아이는 피해 사실을 보호자가 알게 되고 수사가 시작되더라도 평소처럼 학교와 학원에 다니며 일상생활을 그대로 이어간다. 힘들어도 참는 것이다. 이걸 보고 보호자들이 ‘엄마 아빠는 무너졌는데 쟤는 왜 멀쩡하냐’고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아이들의 특성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게 아니다.”

―어린 시절 겪은 그루밍 피해는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어린 나이에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온라인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상대가 사실은 범죄자였다는 경험은 앞으로의 대인관계 형성과 유지에 큰 어려움을 준다. 아이들의 정서와 사회성 발달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강간이나 추행과 같은 물리적 성폭력과 비교해 디지털 성폭력을 가볍게 보는 시선도 있다.
“신체 접촉이 없었다고 해서 더 가볍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 이후 아이가 느끼는 불안과 고통, 회피 같은 트라우마 반응은 굉장히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사진이나 영상 유포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학교에서 누군가가 내 사진이나 영상을 본 것 아닐까’ 하는 불안을 겪으며 두려워하고 위축되는 아이들이 많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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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보냈어?” 피해자 탓하는 부모들

―아이들이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면 부모는 보통 어떤 반응을 보이나.
“크게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 특히 그루밍 피해는 부모가 채팅 내용을 읽어보면 단순히 일방적인 괴롭힘이 아니라고 느낀다. 아이도 같이 재미있게 놀다가 어느 순간 사진이나 영상을 보낸 것이다. 부모 입장에선 ‘우리 애가 왜 이런 행동을 했지?’ 싶어서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러다 아이를 탓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피해자인데도 아이를 탓하는 모습을 보이나.
“그렇다. 그루밍은 마치 아이가 자발적으로 가해자의 요구에 응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채팅 기록을 보면 아이가 어느 정도 동의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왜 보냈냐’ ‘네가 올리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아이에게 책임을 돌린다. 아이를 비난하고 그 이후에 아이의 행적을 일일이 감시하곤 한다. 그러면서 가족 관계는 더 나빠지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진다.

―부모가 그렇게 반응하는 데는 세대 차이도 영향을 주는 걸까.
“부모 입장에서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지금 부모 세대는 그런 경험 없이 자랐다. 부모 세대는 대인 관계가 오프라인에서 시작되고, 오프라인에서 친해진 사람과 온라인 메신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온라인에서 처음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하지?’ ‘왜 개인적인 얘기를 그렇게 쉽게 털어놓지?’ 하는 의문부터 들기 때문에 그 이후에 벌어진 피해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그만큼 세대 간 간극이 크다.”

―그럼 보호자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나.
“디지털 성폭력이 특별히 더 ‘문제 있는’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피해 과정에서 아이의 잘못은 없다. 부모가 이걸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이를 의심하거나 탓하면 안 된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딱 하나만 기억해달라. ‘피해자는 잘못한 게 없다’라는 믿음으로 갖고 전문 기관을 찾아오면 된다.”

―전문 기관을 찾기 전에 보호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대화 내용이나 사진 등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삭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가져오는 게 중요하다. 숨기려 하지 말고 공유해야 제대로 된 지원이 가능하다.”

●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회복해야”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본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의 상처와 마주하는 일은 늘 조심스럽고 마음이 무겁다. 센터에서 온갖 피해를 다 보다 보니 ‘인류애가 줄어든다’라고 말하는 후배들도 있다. 그래도 아이들은 도와주면 잘 따라오고 회복 속도도 비교적 빠르다. 보호자와 호흡이 잘 맞으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걸 보면서 의사로서 보람을 느낀다.”

―왜 소아정신과 의사가 됐나.
“일단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삶을 이해해야 도울 수 있다는 점이 멋있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큰 관심이 없어서 세부 전공으로 소아정신과를 선택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자녀가 생기고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너무 예쁘게 느껴졌고, 그래서 소아정신과를 택하게 됐다. 아이들은 보호자와 협력이 잘 이뤄지면 회복도 빠르고 그건 내게도 큰 힘이 된다. 그래서 덜 지치고 진심으로 진료할 수 있다.”

―지금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본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람으로 인해 생긴 상처와 고통은 사람을 통해 회복해야 한다. 다른 걸로는 해결하기가 좀 어렵다. 부모에게 이야기했다가 혼만 나서 위축된 친구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 너무 두려워하거나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말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용기를 내달라.”

※ 성폭력 디지털 성범죄 가정폭력 교제 폭력 스토킹 등으로 전문가 도움이 필요하면 여성 긴급전화 1366에 전화하세요. 365일 24시간 상담 및 긴급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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