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현 솔리다임)를 90억달러(약 10조3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을 때 시장 반응은 싸늘했다. 당시 삼성전자, 일본 키옥시아 등 6개 기업이 난립해 제 살 깎아 먹기 ‘치킨게임’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승자의 저주’에 빠지는 길처럼 보였다.
인수 직후 찾아온 반도체 불황으로 솔리다임은 수조원대 적자를 봤다. SK의 뼈아픈 실책으로 남는 듯했다. 하지만 6년여가 지난 지금 이 ‘무모한 도박’은 인공지능(AI) 시대를 미리 꿰뚫어 본 ‘신의 한 수’로 재평가받고 있다. 특히 전력 효율과 고용량이 핵심인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시장에서 솔리다임 기술력이 빛을 발하며 빅테크 고객사들이 앞다퉈 찾고 있다. ‘없어서 못 파는’ 귀한 몸이 된 것이다.
◇AI 추론 시대…D램보다 비싸진 낸드
2022년 오픈AI 챗GPT가 등장한 뒤 D램은 초호황을 맞았다. 빠른 데이터 전송 속도가 필수적인 AI 모델 특성상 D램을 쌓아 올려 압도적 속도를 구현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는 수요가 폭발했다. 반면 낸드는 ‘찬밥 신세’였다. D램보다 속도가 느린 데다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라는 강력한 대체재 때문이었다. 같은 용량일 때 HDD는 SSD 대비 최대 10분의 1가량으로 저렴하다. 고용량 낸드일수록 치솟는 제조 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자율주행과 AI 시대가 오면 연산을 담당하는 D램뿐만 아니라 방대한 데이터를 담아둘 ‘창고’인 낸드 수요가 폭발할 것이라는 SK 예상이 적중했다. 낸드는 데이터를 반영구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반도체다. 사람에 비유하면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두뇌’, D램이 ‘책상’이라면 낸드는 거대한 ‘선반’이다. 선반에 물건을 모아두듯 많은 데이터를 쌓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장치다.
낸드 몸값이 치솟는 것은 AI가 학습 위주에서 판단과 실행을 담당하는 ‘추론’ 중심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AI가 사용자와 나눈 사소한 대화까지 기억하자 메모리가 감당해야 할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비싼 HBM만으로는 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낸드 기반 SSD가 데이터센터 핵심 파트너로 낙점되며 수요가 폭증했다.
공급 부족은 가격 상승으로 직결되고 있다. 이달 낸드 현물 가격은 27.04달러로, D램 가격(26.96달러)을 8개월 만에 추월했다. 업계에선 “몇 년 전 HBM 시장이 열릴 때 나타난 폭발적인 성장세가 낸드에서도 재현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부가가치 기술 집약 경쟁 전환
고객사의 넘치는 주문서를 확인한 기업들은 구형 공정을 과감히 축소하고 최첨단 생산라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물량 중심 경쟁에서 수익성이 높은 고부가가치 낸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기술 집약’ 싸움이 본격화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올 하반기 중국 시안 사업장 안에 비워둔 공장(2.5기)에 최첨단 9세대(286단) 낸드 장비를 채울 계획이다. 이는 시안 전체 생산량(월 20만 장)의 25%에 달하는 규모다. 가장 돈이 되는 제품 중심으로 본격적인 수익성 제고에 나서겠다는 의미다. 경기 평택사업장 P4에서도 월 3만 장 규모의 9세대 라인을 구축한다.
SK하이닉스 역시 청주 사업장을 중심으로 국내 낸드 생산량의 절반(월 최대 6만 개 추정)을 최신 9세대(321단)로 전환하는 등 수익성 극대화에 나섰다. 미국 마이크론도 싱가포르 낸드플래시 공장 증설에 240억달러(약 35조원)를 투입하며 경쟁에 가세했다. 그동안 감산에 집중한 키옥시아와 미국 웨스턴디지털(샌디스크 모회사)도 가동률을 회복하며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AI 추론 시장 팽창과 함께 낸드는 메모리 반도체의 또 다른 중심축으로 확고히 자리 잡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기업 간 기술 격차에 따른 시장 재편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해령/김채연 기자 hr.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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