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칸영화제] 고레에다 히로카즈 ‘상자 속의 양’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상자 속의 양’ 앞에선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1년 영화 ‘A.I.’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일곱 살 아들을 대신할 AI 휴머노이드 로봇’이란 설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A.I.’에서 엄마 모니카는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의 빈자리를 채울 휴머노이드 AI 로봇 데이빗을, ‘상자 속의 양’에서 엄마 오토는 죽은 아들 카케루를 대신할 AI 로봇 카케루(동명)를 집으로 들인다. 25년 전 ‘A.I.’가 개봉할 때만 해도 AI 휴머노이드 로봇의 존재는 아직은 좀 이른, 먼 미래의 일로 생각됐지만, 이제 AI 휴머노이드 로봇은 우리가 정말로 곧 경험하게 될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두 영화는 전혀 다른 길을 간다. 전자가 ‘진짜 인간이 되고 싶은 AI 로봇의 욕망과 의지’를 다루는 반면, 후자는 ‘가짜가 진짜를 대신할 수 있는지, 또 새로운 형태의 타자를 수용하는 자세와 관계성의 조건은 뭔지’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AI는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질문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비교는 앞으로도 불가피할 것만 같다. 16일(현지시간) 칸영화제 주행사장인 팔레 드 페스티벌(축제의 궁전) 바쟁 극장에서 ‘상자 속의 양’을 살펴봤다.
오토네와 겐스케 부부가 아들 카케루를 잃은 건 2년 전이었다. 카케루는 일곱 살이었다. 참척의 슬픔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일상을 살아낸다.
그러나 문득 찾아오는 공허감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은 의지로 억누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아내 오토네는 남편 겐스케를 설득해 AI 휴머노이드 로봇을 ‘구매’하기로 결정한다. ‘REbirth’란 회사는 죽은 자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실제 사람과 똑같은, 그리고 행동과 기억까지 ‘학습’된 로봇을 제작해 판매 중이었다. 일본에만 무려 3000명의, 아니 3000‘대’의 AI 휴머노이드 로봇 아이가 작동 중이었다. ‘로봇 카케루’가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자 아들 카케루와 너무나 닮은 로봇의 모습에 두 사람은 놀란다.
엄마 오토네는 로봇 카케루를 아들처럼 대하려 한다. 목 뒤의 버튼을 누르면 작동하고, 밤이 되면 스스로 휴면 상태에 들어가긴 해도 로봇 카케루는 엄마의 상실감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들을 보는 아주 가벼운 일상까지도 재현된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점점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아빠 겐스케는 달랐다. 그에게 로봇 카케루는 그저 ‘다마고치 같은 가전제품’에 가까웠다. 로봇 카케루가 “아빠”라고 부르자 겐스케는 무심하게 “난 네 아빠가 아니기에, 넌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대꾸한다. ‘아빠’ 대신 ‘아저씨’로 부르라는 말도 함께.
“아직 젊은데, 그냥 하나 더 낳지”란 친정엄마의 말, 죽은 사촌이 돌아온 것만 같아 어색해하는 조카들 곁에서 오토네와 로봇 카케루는 새로운 삶에 적응한다. 로봇 카케루는 점점 오토네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파도가 뒤집히듯 평온은 서서히 깨진다. 놀이터에서 로봇 카케루가 ‘인간 아이’들과 놀고 있던 중에 한 남자가 놀이터를 찾아오고, 로봇 카케루가 그 남자와 함께 ‘자신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오토네가 봐버린 것.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여기까지가 영화 초반부 설정이다.
영화 제목이 ‘상자 속의 양’인 이유는 극중 오토네가 로봇 카케루에게 읽어주는 책 ‘어린 왕자’와 관련이 깊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화자가 그려준 양이 마음에 들지 않자, 구멍을 뚫은 상자를 그려주는 대목이 나온다.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상자 안에 있어”라는 문장 말이다. 이 장면은 훗날 작품의 핵심 문장인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는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오토네는 아들 카케루를 로봇으로 재연해 눈앞에 두는 게 옳았을까. 마음의 상자 속에 넣어두고, 먼곳으로 떠난 아들을 상상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그는 ‘어린 왕자’를 함께 읽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토네가 로봇 카케루의 내면을 손전등과 돋보기를 들고 탐사하듯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곳에 ‘아들 카케루’가 실재하는 건 아니다. 영화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특히 로봇 카케루가 살아생전 아들 카케루조차 알지 못했던, 또 알 수도 없는 ‘고통의 기억’을 발설하면서 세 사람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시작되기도 한다.
놀이터에 등장한 한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로봇 카케루는 아들 카케루를 대신할 수 없게 된다. 이 대목은 가장 중요한 스포일러이기에 더 자세히 밝힐 순 없지만, 25년 전 영화 ‘A.I.’와 정확히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A.I.’에서 AI 로봇 데이빗은 하나의 개체로서 행동했지만, ‘상자 속의 양’에서 로봇 카케루는 개체가 아니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인간과 로봇은 동등해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대상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건 수용자의 마음 자세가 아닐까’란 질문을 던진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의 ‘A.I.’가 피노키오 동화의 잔혹한 변주로 기억되는 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상자 속의 양’은 ‘어린 왕자’ 모티프와의 탁월한 접점이란 점에서도 두 영화는 오랫동안 비교될 듯하다.
미래 기술을 다룬 영화여서인지 ‘상자 속의 양’에는 신기술이 여럿 등장한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드론 택배 신으로 열리는 이 영화에는, 어린 학생들의 등교를 돕는 로봇, 뚜껑을 열면 빛의 나비가 날아가는 하트 모양의 상자 등이 나온다. 오토네의 직업이 건축설계사란 점, 또 영화에 나오는 레몬트리와 나무 블록의 의미도 곱씹는 것이 좋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미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거장 중의 거장이다. 이번 칸영화제 진출은 그의 10번째 칸 진출이기도 하다. 다만 ‘상자 속의 양’에 대한 현지의 평가는 많이 박한 상황이다. 스크린데일리 평점은 1.4점(4점 만점)을 기록 중이어서 현재 ‘꼴찌’다. 아마도 영화 후반부에, AI와 관련된 너무나 많은 주제를 집약하면서 영화의 핵심 주제가 혼재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그가 그려낸 ‘미래의 인간’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상 결과는 24일 새벽(한국시간)에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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