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국호 부르면 현행 헌법과 충돌? 김희중 전 대주교 “조금 더 융통성 있게”
한국종교지도자원로회의 2일 ‘한반도 평화공존 선언’ 발표
한국종교지도자원로회의는 이날 선언에서 적대와 대결의 언어를 넘어 상호존중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원로회의는 상대의 이름을 존중해 부르는 일에서 평화가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냈다.
선언에는 김희중 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원행 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김영주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오도철 전 원불교 교정원장,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 김영근 전 성균관장, 이범창 전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이 이름을 올렸다.
원로회의는 국민에게는 언론·시민사회·학계·종교계가 평화공존의 관점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언어와 문화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정부에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대화와 신뢰 회복의 길을 주도적으로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북한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평화공존 의지를 신뢰해 달라고 했다. 원로회의는 평화공존을 상대를 굴복시키는 말이 아니라 서로의 존엄과 생명을 지키는 선택으로 설명했다.
종교계 원로들, 국호 호칭에서 대화의 출발점을 찾다
김희중 전 의장은 현장 발언에서 국호 호칭 문제를 남북 대화 재개의 작은 출발점으로 봤다. 김 전 의장은 “그동안 입에 익숙하지 못했다”며 “남북 관계가 좋을 때는 통일을 지향하는 두 국가라는 맥락에서 남북, 남한, 북조선이라고 불러왔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김 전 의장은 “이제는 북쪽에서 두 국가라고 선언했고, 제가 알기로는 북의 헌법도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어 “북측의 국호를 정확하게 부르는 것이 꽉 막혀 있는 대화의 통로를 여는 작은 구멍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김 전 의장은 이번 제안을 현직 지도부의 공식 결정이 아니라 종교 원로들의 호소로 설명했다. 그는 “저희는 원로들이고 현직에서 물러나 있는 사람들”이라며 “오늘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의 뜻을 모았으니, 각자가 속해 있는 종단에도 북을 호칭할 때 그렇게 고쳐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려 한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만 보는 시각도 경계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적대적 두 국가는 너무 지나친 표현”이라며 “평화를 지향하는 두 국가이고, 언젠가는 하나가 됐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 바람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과제”라고 했다.
상대 국호를 부르면 현행 헌법과 충돌? 김희중 전 대주교 “조금 더 융통성 있게”
김희중 전 대주교는 상대 국호를 부르는 일이 현행 헌법상 영토 조항과 충돌한다는 지적에 대해 “헌법 개정을 앞두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이것은 그런 전 단계라고 보면 된다”며 “유엔에서도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했고, “조금 더 융통성 있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김영주 전 NCCK 총무는 국명은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김 전 총무는 “소련의 위성 국가로 여겨졌던 조지아라는 국가가 있다”며 “소련에서는 그 나라를 그루지아라고 불렀지만, 당사자들은 소련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해서 부르던 그루지아가 아니라 조지아라고 불러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김 전 총무는 “우리 정부가 재빠르게 응답했고, 조지아는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한때 터키라고 불렀던 나라도 터키라고 부르지 말고 튀르키예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했고, 우리 정부는 즉시 그렇게 응답했다”고 덧붙였다.
김 전 총무는 남북 관계에서도 상대가 원하는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일이 적대성을 낮추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하물며 같은 민족인 우리가 적대성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을 불러주기보다, 스스로 나를 이렇게 불러달라고 하는 국호를 왜곡해서 부를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한다”며 “언론에서 많이 협조해 주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희중 대주교 “거대한 둑도 손가락만한 틈새로 무너진다”김희중 전 의장은 종교계의 역할을 거대한 정치적 해법보다 작은 신뢰 회복의 계기로 설명했다. 그는 “거대한 둑이 터지는 것은 큰 파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손가락만 한 틈새를 통해서도 둑이 무너질 수 있다”며 “종교인으로서 조그마한 데서나마 서로의 마음을 녹이고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주 전 총무는 과거 남북 교회가 국제기구를 매개로 대화 통로를 열었던 경험을 들었다. 그는 “한국 교회는 남북이 경직돼 서로 힘들어할 때 교회 간 대화를 통해 통로를 튼 적이 있다”며 “1984년 일본 도잔소에서 남북 교회 지도자가 만났고, 1986년 글리온 회의, 1988년 2차 글리온 회의 등을 통해 남북 교회 간 만남을 국제기구를 통해 이어간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총무는 현재도 종교계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처럼 남북 관계가 꽉 막혀 있는 상태에서 우리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를 종교 지도자들이 모이면 늘 논의하고 있다”며 “이 어려운 시대에 종교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원행스님은 불교계의 민간 교류 경험을 소개했다. 원행스님은 “저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통해 북측을 세 차례 다녀온 적이 있다”며 “당시에는 농기계 수리센터를 지원했고, 목장 사업도 지원했다”고 말했다. 원행스님은 “앞으로도 조그마한 일이라도 그런 일을 통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며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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