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베에 자수로 새긴 여성노동사
지워진 역사와 존재를 재해석
다시 불러내는 5번의 즉흥공연
두루리 울음담은 사운드설치도
7월 2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4명의 공연자들이 한국 근현대 여성 노동사가 수놓아진 태피스트리(직물)를 중심으로 반응하며 감각적으로 몸짓을 만들어낸다. 홍영인 작가의 이 전시에서 태피스트리, 소리, 공연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다. 즉흥적으로 생성되는 에너지와 리듬을 통해 작가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장을 제안하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오는 7월 20일까지 홍영인의 국내 첫 미술관 개인전 ‘다섯 극과 모놀로그’를 개최한다. 전시는 태피스트리와 동물 장난감의 형상을 한 조각들, 그리고 5번의 즉흥 공연으로 이루어진 ‘다섯 극’과 사운드 설치 신작인 ‘우연한 낙원’으로 구성된다.
두 작품은 가부장적 역사 속에서 주변화됐던 여성과 동물의 시선으로 제의적 공간을 새롭게 엮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제의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억눌려 온 기억과 사라진 존재들을 불러내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섯 극’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여성 노동사로부터 출발한다. 40 미터 길이의 둥그렇게 구성된 태피스트리는 총 8개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삼베에 전통 자수 기법으로 수놓아져 있다.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현계옥과 정칠성, 임금 삭감에 맞서 을밀대 지붕 위에서 1인 시위를 벌인 강주룡, 호미를 들고 독립운동에 나선 제주 해녀 부춘화·김옥련·부덕량,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위험한 노동 현장에서 일했던 수많은 소녀 노동자들, 노동자 인권을 위해 싸운 이소선 등의 이야기가 이미지로 새겨져 있다.
홍영인 작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손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해 20년 동안 이 기술을 숙련시켰다. 내 손에 든 바늘 하나에 무수한 여성 노동자들의 삶이 녹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들을 오늘의 감각 속으로 불러내고 싶었다”고 취지를 밝혔다.
둥그런 태피스트리 주변에는 훌라후프나 고리 던지기처럼 놀이 기구를 연상시키는 9점의 수공예 조각들이 있다. 작가가 동물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장치들, 제주 전통 굿에서 사용된 무구 기메, 머리에 짐을 받칠 때 쓰는 똬리 등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해 짚풀과 섬유 등을 엮어 만들었다. 공연 중에 이 조각들은 악기이자 도구, 그리고 신체의 연장으로 활용된다. 앞으로 공연은 이달 24일과 6월 14·28일, 7월 12일 오후 2시에 진행된다.
어두운 방에 따로 설치된 ‘우연한 낙원’에 들어서면 두루미의 꽥하는 울음소리가 쉬지 않고 귀를 때린다. 그리고 “두루미들이 추는 우아하고 사뿐한 춤에 매료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라며 두루미를 예찬하는 한 편의 글이 스크린에 떠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작성하고 낭독한 글을 두루미의 목소리로 변환해 재생한 작업물이다.
홍영인 작가는 “DMZ(비무장지대)에서 두루미를 처음 봤을 때 너무나 아름다운 행위에 자석처럼 끌렸다. 두루미와 나 자신을 교차시키기를 시도해봤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아트선재센터 1∼2층에서는 스페인 현대미술 작가 10명을 소개하는 ‘맑고 투명하고 깨어 있는’전이 열린다. 초청 큐레이터 추스 마르티네스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예술재단인 TBA21 티센보르네미사 아트 컨템포러리의 현대미술 소장품 1000여 점 중 선정한 작품들이다. 한국과 스페인의 수교 75주년을 기념해 스페인문화부가 후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