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성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이 19일 "현재의 임금 체계 하에서의 정년 연장은 안 하는 게 나을 수 있다"고 밝혔다. 최근 정년 연장이 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장 위원은 "고용유연화와 임금 체계 개편, 정년 연장이 함께 추진돼야 건강한 논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 위원은 이날 오전 서울 남대문로 한은 별관 컨퍼런스룸에서 한국의 생산성을 주제로 한 기자간담회에서 "정년만 덜컥 연장하면 상당히 부담감이 커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장 위원은 일본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일본은 계약이 다 끝난 후에 재고용을 하는 형태로 하고 있다"며 "임금을 적게 받아도 좀 더 일할 수 있게 하는 식으로 하면 기업의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2년으로 고정돼있는 비정규직 계약기간을 늘리는 방안도 언급했다. 그는 "보통 은퇴한 사람들은 4~5년 이상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영업에 뛰어든다"며 "(퇴직 후 재고용으로) 2년만 더 일해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렵다고 보고 위험한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2년 후 2년을 더 일할 수 있는 2+2년 형태의 계약이 허용되면 위험한 자영업보다 퇴직 후 재계약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장 위원은 이날 '한국의 생산성이 미국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출신으로 거시·노동 분야를 주로 연구했다. 지난 2021년 경제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로 인정받는 다산경제학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학 학회인 계량경제학회 종신 회원으로 선출됐다.
장 위원은 이번 강연에서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미국의 절반 수준에 그친 점에 주목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56% 수준으로 독일(96%), 프랑스(90%) 등 서구권 국가는 물론 일본(58%)보다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장 위원은 “편의점, 주유소, 은행 등의 판매대나 창구를 보면 한국 직원의 생산성이 미국보다 훨씬 높은 것 같은데 이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미국은 우수한 인재들이 창구가 아닌 더 중요한 일에 배치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재능 위주로 승진시키고 인력을 배치하지만 한국은 연공서열과 순환보직제가 중심이라 이런 업무 배치가 어렵다"고 짚었다.
중국과 인도의 사례로 연구한 보고서에 따르면 두 국가에서 자본과 노동의 비효율적 배분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은 미국 대비 50~6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 위원은 "이 연구에서는 인력과 자본의 재배치만으로도 이들 국가의 GDP가 두배 늘어날 수 있다고 추정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경우엔 비슷한 연구에서 손실이 20~30% 수준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역시 자원 재배치로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다는 게 장 위원의 생각이다.
장 위원은 "인재가 없다고 하지만 현재의 인재 풀로도 충분히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며 "능력이 있지만 소외된 동료가 없는지 주변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간담회에선 통화정책과 관련한 질문도 나왔다. 장 위원은 최근 가계부채가 다시 증가할 조짐을 보이는 것에 대해 "최근 강남 3구 집값이 많이 오르고 거래도 많아졌다"며 "금융안정 측면에서 상당히 주의 깊게 지켜봐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토지거래허가제가 다시 강화된 것에 대해선 "이 조치로 가계부채가 빨리 늘어나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면 (통화정책 부담이) 좀 덜어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