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피로사회 진단한 저자
오늘날 사회는 불안으로 진단
자유롭지 못하고 외로움 만연
불안 이겨내려면 희망이 필요
수동적인 기대와 바람 넘어서
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
불안은 훌륭한 지배 도구다. 대중을 순종하게 하고 공갈에 취약하게 만든다. 불안한 분위기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없다. 불안이 지배하는 곳에 자유란 없다. 불안과 자유는 상호 배타적이다. 불안은 사회 전체를 감옥, 수용소로 만들어 버린다.
10년 전 '피로사회'로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철학자 한병철이 신작 '불안사회'를 출간했다. 저자는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으며, 베를린예술대 철학·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이 책도 '피로사회'와 마찬가지로 독일어로 쓰인 후 한국어로 번역됐다.
제목은 '불안사회'이지만 불안의 반대 개념인 희망에 대해 주로 얘기한다. 불안이 잠식한 사회에서 끊어져 버린 연대와 만연한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불안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희망은 앞으로 나아갈 의미와 방향을 찾게 해준다.
희망에 내재된 부정적인 성격이 중요하다. 가장 내면에 자리한 희망은 깊은 절망 한가운데서 그 눈을 뜬다.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도 강렬하다. 이처럼 희망은 변증법적 모습을 띠고 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희망은 쏟아져 내리는 격렬한 삶의 물살 위로 떠오르는 무지개와 같다. 수백 번씩 물보라에 삼켜지고, 계속해서 또 다른 새로움을 마주하고, 부드럽고도 아름다운 담대함으로 거칠고 위험하게 울부짖는 물보라 위에 다시 솟아오르는 무지개와 같다."
이 때문에 희망적 사유는 낙관적 사유와 다르다. 희망과 달리 낙관주의에는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긍정인 낙관적 사유에는 의구심도, 절망도 없다. 희망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움직임이다. 희망은 방향과 지지할 곳을 찾고자 하는 시도다. 희망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간다. 희망은 임신 상태와 비슷하다. 희망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의 탄생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희망의 주체는 우리다. 희망은 사람들을 고립 혹은 분리시키지 않고 연결하며 화해시킨다. 이렇게 희망은 우리를 공동체화한다는 점에서 불안의 반대 개념이다. 불안은 신뢰나 공동체와도, 친밀함이나 접촉과도 조화롭지 못하다. 불안은 소외, 외로움, 고립, 상실, 무력감, 불신으로 이어진다.
불안의 기후가 지배적인 곳에서 희망은 싹틀 수 없다. 불안이 희망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의 기후, 불안의 체제에 맞서는 희망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희망의 정치가 필요하다.
마틴 루서 킹은 희망의 정치를 아주 적절하게 보여줬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캐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언젠가는 자유를 얻게 되리라 생각하며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투옥되고 함께 자유의 편에 설 수 있습니다." 킹은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희망의 돌을 캔다고 말하며 절망의 산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희망은 행위의 결단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무언가를 희망하는 이는 행위하지 않는다고, 현실을 직시할 눈을 감아 버린다고 말이다. 알베르 카뮈도 그러한 비판적 입장이었다. 그는 "극도의 회피가 바로 희망이다. 삶 자체를 위해 살지 않고 삶을 넘어서려 하고 승화시키려 하고 어떠한 위대한 관념을 받들고 사는 이들의 기만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자는 희망이 수동적인 기대나 바람을 훨씬 넘어선다고 주장하며 카뮈를 비판한다. 감동한 열정과 약동함이 희망의 본질이다. 희망은 호전적 정서이고 희망에는 행위할 결단이 내재해 있다.
[박윤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