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무엇인가. <더 폴> (2008)을 만든 타셈 싱 감독에게 영화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더 폴>은 바로 그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작품이다. 원래 국내에는 2008년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개봉했다. 16년이 지난 2024년 12월 25일에는 <더 폴: 디렉터스 컷>으로 부제를 바꿔 재개봉하면서 5만 명 넘는 관객이 이 작품을 보았다. 영화가 품은 예술적인 요소가 관객의 인정을 받으면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의미다.
영화는 환상이다
병원에 입원한다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치료한다고 해도 신체 훼손으로 인한 고통을 물론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야 해서 지루함도 감내해야 한다. 팔을 다쳐 깁스 중인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운타루)는 아직 어려서 호기심이 많아 아프거나 말거나 병원 여기저기를 쏘다니기에 바쁘다. 그러면서 만난 이가 로이(리 페이스)다.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의 환심을 산 이유는 이야기다. 다섯 명의 용사가 총독 오디어스를 제거하려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모험담을 들려주면 알렉산드리아는 그에 맞춰 이미지를 상상하는데 그 재미가 가히 끝내준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 두 사람이 각각 이야기를 만들고, 어울리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는 과정은 영화 만들기의 기본 시스템과 맞아떨어진다. 상징적이게도 <더 폴>은 시작과 함께 제목처럼 스크린 중앙에 ‘그때 그 시절의 LA Los Angeles Once up on a time’을 자막으로 제시한다. LA의 할리우드는 오락물로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한 곳이다. 알렉산드리아는 로이를 만나기 전 문손잡이의 틈으로 빛이 영사되어 벽에 반사된 달리는 말의 이미지에 매혹되는데 앞으로 전개될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관계를 예고하는 장면이다.
타셈 싱이 이 초반 장면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바는 ‘환상’이다. 영화가 100년이 훌쩍 넘는 동안 사랑받았던 이유는 현실에서 쉽게 보기 힘든 환상을 제공해서다. 영화는 현실에서 환상으로 진입하는 관문인 셈인데 <더 폴>의 첫 개봉 당시 부제에 ‘환상의 문’이 들어간 이유는 그래서다. 여기서 언급한 환상은 좀 더 구별돼서 말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비현실적인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지만, 타셈 싱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없는 걸 있게 만드는 ‘현혹 Delusion’보다 기존의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압도 Spectacle’의 개념으로 환상에 접근한다.
컴퓨터 그래픽을 배제한 <더 폴>의 이미지를 위해 타셈 싱은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곳, 하지만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 무려 4년 반 동안 24개국을 로케이션했다. 노란 모래와 붉은 마차의 색감 대비가 인상적인 장면을 위해 인도 라다크 레 람비르 포르 평원을, 불에 탄 나무에서 주술사가 나오는 씬을 찍으려고 중국과 인도 경계의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해 촬영 당시에는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던 해발 4,350m의 판공 호수를 찾았다. 실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재하기 때문에 더 놀라움을 주는 이미지로 <더 폴>은 관객에게 영화적 환상을 제공한다.
영화는 예술이다
실제 공간을 발품 하여 찍은 장면들을 두고 재개봉에 큰 관심을 보인 한국 관객을 위해 타셈 싱이 인터뷰에서 밝힌 대목이다. “CG는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낡고 시대에 뒤처져 보이게 되거든요. 진짜로 만든 것들, 진짜 로케이션은 절대 낡거나 뒤지지 않아요. 아주 오랫동안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의 말에서 유추하건대 환상의 이미지를 다루는 타셈 싱의 연출 태도는 수백 년이 지나도 원본의 형태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명화, 즉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실제로 감독들에게 스크린은 화가의 캔버스와 같아서 걸작으로 칭송받는 영화들은 시그니처처럼 관객의 인상에 남을만한 장면 혹은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더 폴>은 영화 한 편 전체가 명장면이라 해도 될 정도로 타셈 싱이 들인 공이 엄청나서 보고 있으면 ‘예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환상적인 볼거리로 넘쳐난다. 장면 하나하나가 미술관에 전시된 명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할 뿐 아니라 실제로 타셈 싱은 관객을 매혹하는 이미지를 위해 유명 화가의 작품을 인용하거나 패러디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다섯 명의 용사 중 리더격인 마스크 밴디트는 살바도르 달리의 <여배우 메이 웨스트의 초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 빨간 안대를 착용한 모습이 강렬하고, 이들을 잡겠다고 동원된 병사들이 지그재그로 펼쳐진 계단을 가득 메운 장면의 구조는 M. C. 에셔의 <상대성이론> 혹은 <볼록형과 오목형>과 맞닿아 있어 흥미롭다. 또한, 오프닝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마주 보고 달려가는 기찻길의 말의 구도는 알렉스 코빌의 <말과 기차>를, 마스크 밴디트와 화려한 수영장에서 싸우던 중 사망하는 오디어스의 모습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어>를 연상하게 한다.
24개국을 로케이션하며 명화 속 이미지를 실제처럼 재현하여 스크린에서 진짜로 보여줘야 했던 이유, 이게 <더 폴>의 핵심으로 타셈 싱이 생각하는 영화의 원초적인 재미이자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다. 1981년 기숙학교에서 불가리아 영화 <요호호>를 보고 감독이 된 후 2000년 리메이크 판권을 확보하고 <더 폴>을 완성하기까지 27년, 그 여정과 연출 방법은 곡예를 펼치듯 무모하면서도 스릴 있고, 거짓말 같아 더욱 경이롭게 다가온다. 영화에서 이런 감정을 제공하는 분야는 '스턴트 Stunt'다. 그리고, 극 중 로이의 직업은 스턴트맨이다.
영화는 스턴트다
로이가 병원에 입원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더 폴>의 오프닝 장면에서 말에서 낙상하여 다리 밑으로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되어서다. 영화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장면을 위해 존재하면서도 전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스턴트맨의 처지는 로이가 입원한 병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반 병동에 입원하여 전혀 주목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 병원을 찾은 주연 배우가 간호사는 물론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사인 요청을 받는 것과는 확연하게 대조된다.
현실에서의 불합리한 상황이 역전되는 경우가 바로 로이와 알렉산드리아가 합작해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여기서 로이는 현실과 다르게 가장 주목받는 주인공이자 리더이고 그와 대척점을 이루는 인물이 악당으로 설정된 주연 배우, 즉 오디어스이다. 사실 로이가 이런 이야기를 꾸민 이유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였다. 이제 더는 스턴트맨으로서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한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에게 호감을 산 후 모르핀을 가져오게 해 이 세상과 안녕을 고할 생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더 폴>은 타셈 싱이 그동안 죽어라 고생만 하고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스턴트맨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엔딩에는 스턴트를 예술의 경지를 끌어올린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해럴드 로이드 등 무성영화 시절의 스타는 물론 이름 없는 스턴트맨들이 관객에게 순수한 재미를 주겠다는 목적하에 안전장치 없이 몸을 던져 완성한 난이도 극강의 슬랩스틱 장면이 몽타주로 포함되어 있다. 영화의 역사는 스턴트를 빼놓고는 성립하지 않고, 그래서 예술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을 의심할 영화 팬은 아무도 없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영화의 환상은 손쉬운 방식으로 실현할 수 없는 스턴트의 영역이다. 삭제됐던 1분 40초 정도의 장면을 복원해 4K로 리마스터링하여 <더 폴>을 공개했을 때, 타셈 싱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더 폴> 같은 영화가 가능할까요?” 이에 대해 타셈 싱은 이렇게 답했다. “제가 만들었을 때도 불가능했어요. 어디를 가도 절대 만들 수 없는 영화였고, 만들어서는 안 되는 영화였죠.” 재개봉을 하면서 국내 첫 개봉 당시 2만 8천 명보다 두 배 가깝게 늘어난 관객이 찾은 <더 폴>은 타셈 싱의 바램처럼 오랫동안 사랑받는 영화가 되었다.
['더 폴: 디렉터스 컷' 메인 예고편]
허남웅 영화평론가